토박이의 깊이에서 K-문명까지, 황석영이 그리는 한국 문학의 미래
김재준 | 웹진문강 편집장, 국민대 명예교수

두 번째 만남에서 나는 조금 무리를 했다. 선생이 아직 쓰지 않은 차기작을 한번 예측해서 써본 것이었다. 미술평론을 쓸 때 화가 김종학의 그림을 따라 그려본 적이 있다는 얘기를 곁들여, 이건 제가 쓴 게 아니라 선생님이 쓰신 거다, 라고 일러두고 보여드렸다. 지금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화끈하다. 이 말도 지울까 말까 하다가 일단 그냥 두기로 했다. 「씻김」이라는 콘셉으로 한반도라는 땅 자체를 주인공으로 삼은 대작의 초고였다. 선생은 받아 들고 가만히 보더니 웃으며 한마디 했다
황석영
ChatGPT나 Gemini가 나에게 요구하고 있는 그것으로 알아들을게요.
그러고는 담배를 피우러 일어섰다. "이게 버릇이야. 글을 쓰거나 뭘 좀 진지하게 하려면 담배를 물어야지." 4월 22일 오후, 두 번째 만남은 거의 세 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함께 자리한 사람은 김재준과 박범수, 그리고 첫날 동석했던 김정선이었다. 그날의 대화는 AI와 망설임에서 시작해 차기작, K-문명과 동학, 토박이 얘기꾼, 민담 리얼리즘, 자유로의 안개와「심청」회고, 번역 정책, 문화 도시, 학창시절의 두 번의 가출, 원로 작가의 자리까지 휘돌아 흘렀다. 이 글은 그 시간을 열 개의 줄기로 다시 묶은 것이다.
이 글의 본문은 거의 전부 선생의 목소리로 되어 있다. 김재준과 박범수의 발언은 모두 지문 안으로 들여놓았다. 선생의 말은 가능한 한 호흡과 비약을 살려 그대로 옮겼다.
1. 망설임의 자리 – AI와 인간
자리에 앉자마자 ChatGPT 얘기가 먼저 나왔다. 「장길산」 시절에 이것이 있었더라면 좋았을 거라고 했다.
황석영
진작에 저런 게 있었으면 「장길산」 한 2년이면 썼을 거야. 자료를 검색하고 소화하는 데에는 정말 좋지요. 그 이상은 아직 AI가 소설을 쓴다는 건 불가능한 것 같아요. 사람한테는 무의식이나 잠재의식 같은 게 있잖아요. 그 공간이 뇌세포 어딘가에 있는데, 거기서 우리가 꿈을 꾸는 거지. 이런 활동을 ChatGPT나 인공지능은 안 하니까. 잠도 안 자잖아요.
문창과에서 꽤 잘 쓰는 정도까지는 이미 AI가 한다, 다만 대가의 그것까지는 아직 아닌 것 같다고 내가 말했다. 선생은 더 단호했다.
황석영
아니, 그것도 안 될 것 같아요. 그게 다른 겁니다.
박범수가 며칠 전 화제가 됐던 김애란 작가의 발언을 가져왔다. 4월 15일 MBC 「손석희의 질문들」에 출연한 김애란이, 인간에게만 있고 AI에게는 없는 게 “망설임”이라고 말한 일이었다. 누군가의 고민이나 아픔을 들을 때 말을 삼키거나 주저하거나 짐작하고 헤아리는 찰나, 그 주저함 안에 힘겹게 서 있는 배려와 품의가 인간을 인간으로 만든다는 것. 손석희 앵커가 노회찬 의원의 부고를 전하던 중 20초간 말을 잇지 못했던 침묵이 그 예시였다. 인간만이 망설일 수 있다고 했다.
선생은 짧게 끄덕였다. 길게 받지는 않았다. 잠과 꿈, 그리고 망설임. 김애란의 윤리적 진술과 황석영의 신체적 진술이 같은 자리를 다른 각도로 가리키고 있었다. AI가 잠을 안 자고 망설이지 않는다는 것. 효율로 환산되지 않는 인간의 잉여가 거기에 있다는 것. 선생이 그 잉여를 가리키는 방식은 짧고 단단했다. 잠을 자야 한다. 그래서 꿈을 꿔야 한다. AI는 그것을 안 한다. 그러므로 다르다.
2. 운명의 전환기 – 차기작 세 후보
내가 차기작을 묻자 선생은 5월 12일 카자흐스탄 출발이라고 했다. 약 2주 일정. 차기작 취재였다. 제목은 영어로 「Earth Day」
황석영
다음 작품은 — 지난번에 얘기했던가 — '또 다른 땅'이오. 그래서 'Earth Day'. 홍범도 얘기인데, 의병이니 포수니 봉오동 전투니 청산리 전투니, 이름 날리던 시절은 다 빼고. 만년에 고려극장에서 수위로 일하던 그 몇 년 사이의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사실 이게 남들은 싫어하지요.
그가 끌어오려는 또 한 명은 1920년 1월 4일 간도 용정 부근에서 일본 호송대의 군자금 15만 원을 탈취한 철혈광복단 청년 여섯 중 하나였다. 사건 직후 밀정의 배신으로 대부분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체포되어 윤준희·임국정·한상호는 1921년 8월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당했다. 그 가운데 도망쳐 살아남은 사람이 최봉설이다.
황석영
그런데 나는 시간을 좀 당겨보려고 해요. 그 사건이 벌어졌을 때 연변에서 청년 다섯이 — 사실은 여섯이지 — 15만 원 현금 마차를 털었잖아요. 1920년인가 21년이지. 현장에 배신자가 있어서 일본 헌병대가 습격을 했고, 두 명이 그 자리에서 사살되고 두 명이 잡혔어. 잡힌 친구들은 서울로 끌려와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당했지요. 재판 기록도 남아 있어요. 그런데 한 명이 도망을 쳤어. 어느 강을, 얼어붙은 강을 맨발로 건너서 탈출을 했어요. 아마 연해주, 하바롭스크 근방쯤에서 살았던 것 같아. 그러다 1937년에 조선인들 싹 강제이주 시킬 때 거기 휩쓸려 카자흐스탄으로 갔지. 홍범도도 거기로 끌려갔잖아요. 다 묻혀서 살았어요. 옛날에 뭘 했는지 묻지도 않고, 이름도 사라졌으니까.
도망자 청년은 카자흐스탄 어느 숙박업소 주인의 딸과 결혼해 부부로 살았다고 했다. 그게 본래의 자료다. 그런데 그게 재미가 없다는 게 선생의 말이었다.
황석영
그 사람이 탈출해서 자기를 숨겨준 숙박업소 주인 딸하고 눈이 맞아 결혼을 했어요. 그래서 부부가 카자흐스탄에 가서 살았는데, 그게 소설로는 재미가 없어. 1937년이면 그 사람은 이미 마흔 줄이거든. 1921년에는 청년이었지만. 청년과 노인의 관계가 더 재미있잖아요. 그래서 나는 소설이니까 시간을 확 당겨버리는 거예요. 사건을 저지른 그 청년이 그대로 카자흐스탄에 가 있게 만드는 거지. 청년과 노인이 한 3년 동안 묘한 우정을 나누면서 일상을 보내는 얘기예요. 청년은 술집 웨이터를 하고, 극장에 가끔 들러 기웃거리고, 여배우를 짝사랑도 해보고. 그러니까 역사가 끝난 자리에서 일상이 시작되는 거지요.
청년의 노트가 우연찮게도 문익환 목사의 오촌 당숙 형의 것이었고, 그 노트가 배우 문성근을 통해 선생에게 전해졌다고 했다.
황석영
한 20년쯤 전에, 배우 문성근이 — 그 친구 아버지하고 내가 가까웠으니까 나를 삼촌이라고 부르거든, 사실 나이 차는 여덟 살밖에 안 되지만 — 그 문성근이 노트를 하나 가져왔어요. 그 청년이 문익환 목사의 오촌 당숙 형이거든. 그 사람이 쓴 노트를 나한테 주면서 써달라고 그래요. 그러다 우물쭈물하고 있는 사이에 연변에서 15만 원 사건이 책으로 나와버렸어. 흥미는 있었지만 너무 알려져서 손을 안 댔지. 그러다 가만히 생각하니까, 두 사람이 같은 공간에 있었고 서로 왕래도 했다고 그래요. 그러니 그 청년을, 쌩쌩한 청년 그대로 거기에 갖다 놓자. 18년을 지워버리는 거지. 시간 차이는 작가 후기에 밝히면 되는 거고. 이게 재미있는 얘기가 될 것 같아. 그래서 그게 지금 다음 작품이 된 겁니다.
차기작이 그것 하나가 아니라는 게 두 번째 놀라움이었다. 선생이 망설이고 있는 한 편이 더 있었다. 동학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이었다.
황석영
그러고 나서 조금 더 기운이 있으면 마지막으로 하나 더. 지금 전 세계가 문명 전환기에 와 있는데, 동북아에서 가장 중요한 자생적 근대 사상이 동학이거든요. 그것을 집대성한 사람이 누구냐. 기독교로 치면 세례 요한이 최제우이고, 예수가 최시형이지. 사실 동학은 최시형이 완성한 거예요. 그런데 그 사람이 평생 한 35년인가 37년인가를 도망 다녔어요. 옮겨다니면서, 하룻밤 묵고 나면 그 집에 과일나무 한 그루를 심어놓고 가고, 아니면 멍석이라도 하나 짜놓고 가고. 그렇게 살았어요.
그러더니 선생은「장길산」쓰던 시절 강원도와 소백산 자락의 화전민들 사이에서 처음 들었다는 별칭 하나를 꺼냈다.
황석영
내가 「장길산」 쓰던 무렵에 강원도며 소백산 자락 같은 데를 돌아다녔어요. 그때도 화전민들이 있었거든. 거기 사는 이들하고 얘기를 하면 해월 최시형은 이름도 몰라요. 그런데 '최보따리'라고 하면 다 알아. 그 사람들한테는 최보따리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는 거지. 도망 다녔으니까 누군지는 몰랐는데, 하여튼 최보따리가 굉장히 대단한 사람이라는 게 산속 사는 주민들한테 퍼져 있었어요. 지금도 경상도 사람들은 최시형이 아니라 최보따리라고 합니다. 그래서 「최보따리」를 제목 삼아 최시형 이야기를 한 편 쓸까 하다가, 지금은 망설이고 있어. 동학을 하도 사방에서 건드리니까. 요즘은 유행이에요.
여기서 선생의 화제는 잠깐 동학에서 인공지능과 자본주의로 옮겨갔다.
황석영
그런데 재미있는 게 있어요. 보세요. 기술 발전이 이렇게 되니까, 옛날에 사무직원이나 화이트칼라가 하던 일을 지금 AI가 하고, 노동자가 하던 일을 로봇이 하잖아요. 그 둘이 다 가버리면 사상 체계가 다 엉망이 됩니다. 자본주의니 뭐니 하는 것들이 다 흐트러지는데, 미국 쪽에서는 그걸 기독교로 어떻게 땜빵을 하려는 것 같아요. 따로 이데올로기가 없거든. 중국을 굉장히 부러워해. 중국 같은 체계를 — 기술 엘리트가 폐쇄적으로 운영하는 체계 — 트럼프를 내세운 그 그룹들이 생각하는 게 그쪽인 것 같아. 우리 후배 하나는 그 이데올로기를 신학적 체계로 떼울 거라고 그러더라고요. 한편 지젝은 — 한국에는 '신공동체주의'로 번역돼 있지만 원어로는 'Neo-Communism', 신공산주의예요. 결국 선한 권력의 문제거든. 1%밖에 안 되는 기술 엘리트 세계에 자본과 기술이 집중되는데, 그 간극을 팬데믹 때처럼 분배해서 메워야 한다는 거지. 자원과 일자리를 나눠야 되는데.
그리고 다시 동학으로 돌아왔다.
황석영
결국 인민에 의한 선한 권력을 만드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 — 이게 좌파들 쪽의 생각이에요. 그런데 그걸 동아시아적으로 풀어보면 동학의 근대 사상 안에 이미 들어 있거든요. 그러니 문학이나 철학, 사상 쪽에서 더 세련되게 가꾸고 형상화할 필요가 있지 않겠나, 그런 얘기를 친구들끼리 시작하려는 참이에요. 그런데 이제 「최보따리」를 내가 쓰게 될지, 안 쓰게 될지 모르겠어. 또 하나 떠오르는 게 있는데, 칭기즈칸이 정복을 해 나가잖아요.
세 번째 후보는 칭기즈칸이었다.
황석영
유목민들을 전부 연합시켜 갖고. 그 사람들 방식은 공포를 주는 거예요. 가서 — 너희 항복해 — 선포해 놓고, 말 안 듣고 저항하면 사흘 동안 짐승, 닭 한 마리까지 남기지 않고 싹 쓸어버리거든요. 그러다가 이슬람 쪽으로 갔을 때 유명한 일화가 하나 있어요. 그 이후로 칭기즈칸이 변합니다. 자료가 지금 아물아물한데, 어느 성을 포위했을 때 그가 생각을 바꿔요. 점령한 뒤에 한 사람도 죽이지 않는다는 거지. 종교인은 종교인 그대로, 기술자는 기술자 그대로 다 받아들여. 거기가 오아시스 도시 중 하나인데, 그걸 다 흡수해버린 거지. 그 방식이 이후 제국 건설의 기초가 됩니다. 그 변화의 자리. 그 성 이름이 지금은 안 떠오르는데, 그 전투가 아주 재미있어요. 그래서 그걸 두 달 동안에 — 칭기즈칸의 변화와 그 성을 점령하는 과정을 — 한 5, 6백 매짜리로 한번 써볼까 하는 생각도 있어요.
황석영
유목민들을 전부 연합시켜 갖고. 그 사람들 방식은 공포를 주는 거예요. 가서 — 너희 항복해 — 선포해 놓고, 말 안 듣고 저항하면 사흘 동안 짐승, 닭 한 마리까지 남기지 않고 싹 쓸어버리거든요. 그러다가 이슬람 쪽으로 갔을 때 유명한 일화가 하나 있어요. 그 이후로 칭기즈칸이 변합니다. 자료가 지금 아물아물한데, 어느 성을 포위했을 때 그가 생각을 바꿔요. 점령한 뒤에 한 사람도 죽이지 않는다는 거지. 종교인은 종교인 그대로, 기술자는 기술자 그대로 다 받아들여. 거기가 오아시스 도시 중 하나인데, 그걸 다 흡수해버린 거지. 그 방식이 이후 제국 건설의 기초가 됩니다. 그 변화의 자리. 그 성 이름이 지금은 안 떠오르는데, 그 전투가 아주 재미있어요. 그래서 그걸 두 달 동안에 — 칭기즈칸의 변화와 그 성을 점령하는 과정을 — 한 5, 6백 매짜리로 한번 써볼까 하는 생각도 있어요.
세 후보가 결국 같은 자리를 향한다고 짧게 매듭지었다
황석영
그런 게 다 지금 이 운명의 전환기를 보면, 다 그 생각들이에요.
전환기에 어떻게 살아남는가, 그리고 어떻게 다음으로 넘어가는가. 일상으로 살아남는 홍범도의 청년, 도망으로 살아남는 최보따리, 학살에서 흡수로 전환하는 칭기즈칸. 셋이 다른 무대에서 같은 변주로 흐르고 있었다.
3. K-문명과 그 가능성
내가 K-문명이라는 말을 꺼낸 것은 다음 차례였다. K-팝, K-드라마, K-푸드의 끝판왕은 결국 K-문명이 될 텐데, 한국적인 게 뭐냐고 물으면 가장 독특한 점은 들어온 사상과 종교를 하나도 버리지 않고 다 들고 있다는 점이었다. 새 종교가 들어오면 옛것이 사라지는 게 보통인데 한국은 그게 다 남는다. 무속도, 도교도, 불교도, 유교도, 동학도, 기독교도. 거기서 출발해 가상 차기작 얘기를 했다. 한반도 땅 자체가 주인공이 되는 드라마. 「할매」에서 나무가 주인공이었듯, 이번엔 땅..
선생은 한참 듣다가 신화 설화에서 출발해 후배 이병한 얘기로 한 번 우회했다.
황석영
중국 것도 있고 신화 설화집이 많아요. 동북아 설화가 샤먼 쪽에 남아 있는 게 재미있는 게 많습니다. 엊그저께 광주 갔다가 — 내가 괜찮은 인물들은 따로 챙겨두고 인적으로 관리를 하거든. 개인적으로. 그중에 하나가 이병한이에요. 유라시아 기행문도 쓰고, 요새는 중국이니 미국 기술 상황이니 하는 책을 쓰는 친구. 원광대에 있다가 광주 GIST로 갔어요..
박범수가 자신의 단톡방에서 도는 다른 의견 하나를 가져왔다. 주도권을 행사하려면 차라리 K자를 떼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한국적인 것이 글로벌해지려면 K라는 라벨을 먼저 떼야 하는 것 아니냐는 것. 나는 약간 다르게 봤다. 그렇게 극한까지 가야 그걸 뗄 수 있다, 너무 미리 떼는 것보다 끝까지 가서 저절로 떨어지게 만드는 게 낫다는 얘기였다. 글로벌해진 것이 한국적이고, 한국적인 것이 글로벌한 것이 되는 그 자리. 그러나 우리에게 한계는 분명하다고 덧붙였다. K-팝이 전 세계의 주목을 받지만 그것을 평가하는 담론은 다 외국 사람들이 만든 서양 철학이라는 점, 우리에게 우리 언어가 없다는 점.
선생은 그 말을 받아 한 줄로 정리했다.
황석영
맞아요, 맞아. 요새 여기저기 떠드는 철학자, 평론가들도 그렇고, 전부 외국 이론, 외국 철학이야. 그게 한계거든요. 좀 자기 목소리를 자기에 근거해서 했으면 좋겠어요.
그러더니 잠깐 말을 멈췄다.
황석영
한국 무속, 동학 — 이런 데에 엄청난 잠재력이 있어요. 정말입니다. 우리가 부끄럽게 여기는 그것에. 지금 시대가 바로 그런 걸 요구하고 있어요. 전 세계가. 내가 「칼라」를 하려고 하는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입니다.
K-문명이라는 말이 거창하다면, 선생이 짚은 건 그것의 가장 작은 단위였다. 자기 목소리를 자기에 근거해서 한다. 그게 안 되면 K가 붙든 떨어지든 같은 문제가 반복된다. 한 줄짜리 진단이었지만 그 한 줄에 한국 학계와 평단 전체에 대한 불만이 다 들어 있었다.

4. 토박이와 외방 사이
이 대목에서 선생은 벤야민을 길게 끌어왔다. 토박이 얘기꾼과 외방 얘기꾼.
황석영
얘기꾼에는 토박이 얘기꾼과 외방 얘기꾼이 있어요. 토박이는 동네에 내려오는 전설이나 비밀을 간직했다가 후대에 전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위로부터 들은 것에 자기가 새로 덧붙이기도 하고. 그 동네에 가령 삼돌이가 왔다 갔다 하면 — 아, 저놈이 왜 태어났느냐, 몇 년 전에 소금장수가 지나가다가 이쁜이를 만나 물레방아에서 눈이 맞아가지고, 소금장수는 사라지고 저놈이 남은 게 삼돌이다 — 라든가. 저 버드나무는 몇 년 전에 벼락을 맞아 한쪽이 찌그러졌다든가. 그런 것들을 간직했다가 전해주는 게 토박이지요. 외방 얘기꾼은 자의로든 타의로든 쫓겨나서든,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올라간 사람이에요. 자기 고향 얘기에 허풍을 덧붙이지. — 야, 우리 고향에는 배하고 사과하고 복숭아가 한 나무에 같이 열린다 — 그러고. 또 돌아와서는 — 야, 서울 남대문이 얼마나 높은지 구름이 걸려 있고 사람이 수만 명이 다니더라 — 또 허풍을 때리지요. 바깥 얘기를 안으로 전해주고, 안의 얘기를 바깥으로 전하는, 두 종류의 얘기꾼이 있는 거예요.
여기까지가 비유였다. 그러더니 곧장 본론으로 들어왔다.
황석영
그런데 한국 같은 변방 — 그땐 변방이었지요, 중앙을 중심으로 두고 보면 — 그 변방을 놓고 얘기하자면. 세계 문학이라는 개념을 가장 먼저 말한 게 괴테라고 알려져 있는데, 괴테 당대가 18세기 아닙니까. 괴테가 세계 문학을 말했을 때 그의 뇌리에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가 들어 있었겠는가. 없죠. 그가 말한 세계 문학이라는 건 유럽 문학입니다. 그 위에 형성된 세계 문학의 보편성이라는 게 결국 유럽적 보편주의예요. 내가 노벨상을 비판하는 것도 그런 이유거든. 그 뒤로 어떻게 됐느냐. 제국주의가 발화하면서, 말하자면 그 유럽적 보편주의 안에 들어가야 하는 거예요. 그래야 보편성에 진입하는 거지. 그 안에 들어가면 세계 속에 존재하는 거고, 들어가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거예요. 그것을 권력의 레토릭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 보편주의를 대개 좌파들이 그렇게 비판해 왔지요.
20세기를 거치며 외방 얘기꾼이 훨씬 유리한 세상이 됐다고 했다.
황석영
유럽 좌파들도 마찬가지고, 우리는 더 그랬어요. 그들의 목적은 토박이성을 억제하거나 말살하는 데 있었어요. 그런 보편주의를 내세워야 하니까 토박이 얘기꾼보다 외방 얘기꾼이 훨씬 유리한 세상이 된 거지요. 황석영이를 봐라, 그 자신이 보더라도 — 나는 어차피 외방에 속해 있거든. 스스로 생각해보면 그래요. 그럼 「장사의 꿈」 같은 건 어떻게 썼느냐. 그건 공부해서 쓴 거예요. 노력해서. 그걸 깨닫고.
30개국 가까이 번역된 작가가 행사장을 다니다 보면 라이벌이 누구냐는 질문을 받기 마련이다. 프랑스에서 받은 그 질문 자리에서 즉답으로 떠오른 이름이 이문구였다고 했다.
황석영
내가 후반기에 문학을 하면서 한 30여 개국에 번역이 나가 있으니까 행사를 많이 다녔을 거 아니에요. 어느 날 프랑스에서 행사를 하는데 한 기자가 물어요. — 너는 동시대에 라이벌이 없냐, 라이벌이 있을 거 아니냐. — 잠깐 생각하니까 팍 떠올라요. 아, 나한테도 라이벌이 있네. 이문구라는 작가가 떠올랐어요. 이문구라고 있다고 얘기해줬지. 그랬더니 — 왜 너희가 라이벌이냐. — 그래서 대답했어요. 나는 그 사람 같은 작품을 쓸 수 없고, 그 사람은 나 같은 작품을 쓸 수가 없다. 가장 큰 차이는, 내 작품은 번역하기가 굉장히 쉽고 그의 작품은 번역하기가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어렵다. 그만큼 토속적인 문장을 쓰는 사람이다. 그런데 황석영의 작품도 지금 그쪽으로 가고 있다. 자꾸 번역하기가 힘들어져서 손해를 보고 있지만 그쪽으로 가고 있다고. 내가 그렇게 대답했어요.
이 한 단락이 자기 정의였다. 외방에서 토박이로 이동 중인 작가의 자기 정의. 손해를 보더라도 그쪽으로 간다는 것. 그리고 곧장 그 이동에 필요한 한 가지를 덧붙였다.
황석영
그런데 이게 무슨 얘기냐 하면. 요즘 현실에서는 노마드라는 게 하나의 문화적 전략, 심지어 칭찬할 만한 미덕처럼 떠받들어졌잖아요. 그러는 동안 토박이성은 거의 멸살되고, 정체성 얘기를 꺼내면 촌놈, 웃기는 놈이 돼버리는 식이었어요. 그런데 이게 대단히 중요한 거예요. 정말 외방 얘기꾼이 훌륭한 얘기꾼이 되려면, 토박이의 깊이에 대한 경외감을 가져야 한다는 거지. 사랑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바닥에 깔고 있어야 해요. 그래야 자기의 부족한 점을 메우면서 완성에 가까워지는 작가가 됩니다.
외방이 토박이를 멀리 둘 때가 아니라, 토박이를 깊이 끌어안을 때 외방의 일이 비로소 완성된다. 노마드라는 단어가 한 시대를 풍미하고 지나간 자리에서, 선생이 다시 꺼내든 개념은 정확히 그 반대편에 있었다.
5. 민담 리얼리즘
라틴아메리카 문학 얘기로 옮겨갔을 때 선생의 호흡은 더 빨라졌다.
황석영
여기까지가 벤야민이 한 얘기예요. 그 뒤에 내가 다른 자리에서 덧붙인 거지. 20세기 문학을 보자고. 2차 대전을 거치고 온갖 고통을 겪고 정신을 차려 보니, 그때 깨닫게 된 또 다른 휴머니티가 있어요. 거기에 감동이 실려 있죠. 그 고통이 바닥에 깔려 있었으니까. 그러다 20세기 중반으로 오면서 그게 다 흐트러지고 굉장히 양식화됩니다. 양식주의로 가고, 벽에 부딪히고. 재미가 없어져요. 서사가 점점 맥이 빠지고 사라져 갈 무렵, 라틴아메리카 문학이 확 들어옵니다.
라틴아메리카는 특수한 조건에 있었다고 했다.
황석영
라틴아메리카 문학을 봅시다. 그건 완전히 말살된 문명이잖아요. 아즈텍이나 잉카 같은 거대한 문명을 등 뒤에 짊어지고 있는 거지. 어느 정도로 심하게 말살되고 강간당했느냐 하면, 언어는 물론이고 피까지도 그래요. 백인의 피가 많이 섞일수록 계급이 높아. 제일 위가 밖에서 들어온 스페인 사람, 포르투갈 사람이고, 맨 밑이 인디오, 원주민이지요. 그런 사회예요. 거기서 자기 언어를 잃어버리고. 문명의 바탕은 인디오의 감정 속, 생활 속에 깔려 있지만 그게 스페인어로 표현되기 시작하니까, 완벽한 서구 언어로 자기를 표현하는 일이 가능해진 거예요. 그게 충격이 됐어. 수혈이 된 거지요.
말살된 과거는 신화가 된다. 불러올 구체적 과거가 없으니 마술적이 될 수밖에 없다는 진단이었다.
황석영
20세기 중반에 양식주의 속에서 서사가 다 죽어갈 때, 확 들어온 거예요. 타자가. 그게 수혈이 돼서 다시 풍요로워지지 않았느냐. 이 점을 우리가 굉장히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한때 매직 리얼리즘으로 분류되는 일에 거절한 적이 있다고 했다.
황석영
내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이후에 입장을 정리한 적이 있어요. 「손님」을 쓰고 나니까 서구 평론가들이 — 저거 매직 리얼리즘 같다 — 그러면서 자꾸 그 범주에 나를 집어넣으려 들어요. 모옌도 다 매직 리얼리즘으로 묶고, 모옌에게 노벨상을 주면서도 — 아, 저거 매직 리얼리즘이네. 가오싱젠도 다 그랬어요. 왜 그렇게 하는가. 나는 그걸 거절했지요. 그게 아니라고. 이건 다른 거라고. 라틴아메리카 문학은 참 아름답고 좋지만, 잘 생각해보면 거기는 불러올 과거가 없어요. 다 말살됐으니까. 지워져버렸으니까. 감성과 문화적 전제만 남아 있는 거지. 그러니까 지금 불러올 구체적 과거가 없어요. 서사가 없어요. 신화적이지요. 지나간 꿈처럼. 그러니까 문학적으로는 그게 전략적으로 아주 유리해. 화려하게 끌어올 수가 있는 거지. 신화적인 세계니까.
여기서 한국으로 비교가 넘어왔다.
황석영
그런데 우리는 어떠냐. 햇빛처럼 쨍쨍하게 불러올 과거가 너무 분명하게 있어요. 서사가 있는 거지. 100년 정도면 한 집안 안에 다 같이 살았던 사람들이에요, 우리는. 동학 하면 한 세대 전까지만 해도 다 겪은 일이야. 동네에서 할아버지한테 듣고, 삼촌한테 듣고, 큰아버지가 얘기를 했어 — 누가 어떻게 됐고 그때 어떻게 됐고 다 알아요. 다 불러올 수 있어요. 너무 쨍쨍한 과거. 그러면 어떻게 가야 하느냐, 꼴이 다른 거지요. 우리는 매직이 아니라 민담이에요. 말로 전해진 이야기가, 서사가 층층이 쌓여 있는 거지요. 그래서 코리아 콘텐츠의 위대함은 리얼리티가 살아 있는 데에 있어요. 매직의 그 어떤 비어 있음 — 그게 충족이 안 되니까 다음 세대가 내려와요. 라틴아메리카 문학에서 매직 리얼리즘의 1세대를 '붐 세대'라고 부르는데, 그다음 — 야, 조금 내려오라고, 지상으로 끌어내리는 게 포스트 붐 세대야. 요새 젊은 세대는 더 내려와. 못 살겠다는 거지. 결국 불러올 과거가 확실한 쪽으로 내려오고 싶어 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규정한 게 — 우리는 민담입니다 — 그렇게 나간 거지요.
이 자리는 백낙청 평론가와 한 번 부딪힌 자리이기도 했다고 한다.
황석영
백낙청 평론가가 그 점에 굉장히 완강했어요. 그래서 부딪힌 거지요. 「손님」으로도 부딪히고. 리얼리즘이 아니라고 그러니까. 그건 교과서지요. 리얼리즘의 바리에이션이 필요한 거예요. 자기 리얼리즘을 가져야지. 마르케스도 자기 소설에 관해 물어봤을 때 — 내 소설은 현실주의 소설이다 — 이렇게 답했어요. 카프카도 표현주의니 실존주의니 하는 규정은 평론가들이 한 얘기지, 자기는 — 나는 리얼리즘이다 — 그랬어요. 현실이 항상 문제였던 거예요.
번역의 문제로 흐름이 잠깐 미끄러졌다.
황석영
그런데 이게 번역의 문제예요. 동아시아에서 사회과학 용어, 예술 용어, 기술 용어 같은 근대 용어를 일본이 다 번역해서 만들었잖아요. 그래서 리얼리즘도 일본은 형식적인 것만 떼어왔어요. 19세기 리얼리즘이 품고 있던 그 내용 — 혁명의 시대에 현실이라는 게 어떤 현실이냐 — 그건 빼고 양식만 갖고 얘기하니까 사실주의가 돼버린 거지. 그걸 우리가 그대로 받아서 썼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리얼리즘에 대한 오해가 생긴 거예요. 사진 같은 것으로. 그러다가 80년대에 사회 운동이 한참 으샤으샤 할 때 보니까, 혁명 중이던 중국이 그걸 현실주의로 번역해서 쓰고 있더라고. 그래서 우리도 리얼리즘을 현실주의라고 부르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90년대로 넘어오면서 다시 보니 현실주의도 사실주의도 둘 다 맞닿지를 않아. 그래서 다시 원어인 리얼리즘으로 돌아간 거예요. 이게 용어의 사정입니다.
그래서 결국 자기 리얼리즘이 필요하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황석영
그러니까 바리에이션이 필요하다는 거죠. 그래서 내가 민담 리얼리즘으로 자기 소설을, 자기 문학을 매듭짓겠다고 하는 겁니다. 그걸로 끝을 내겠다는 거지. 이제부터 나는 민담 리얼리즘이고, 민담 리얼리즘이 동아시아에서 가능해진다 — 그런 주장을 하는 거예요.
자기 리얼리즘을 가지려면 자기 과거를 가져야 한다. 한국은 그게 너무 쨍쨍하게 있다. 그게 매직 대신 민담으로 가는 이유였다. 토박이의 깊이를 외방이 끌어안는 자리, 자기 과거의 무게를 자기 양식으로 다시 만나는 자리가, 선생이 자기 문학에 매듭짓고 싶어 하는 자리였다.
6. 자유로의 오리떼 — 「심청」이 떠오른 자리
쨍쨍한 과거가 어떻게 한 편의 소설이 되는가. 두 번째 만남에서 선생은 「심청」이 떠오른 정확한 순간을 길게 들려줬다. 일산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자유로 위, 안개로 차가 한 시간 넘게 막혀 있던 어느 날 아침이었다.
황석영
일산에서 시내로 나가려면 자유로를 타고 가는데, 옛날에 택시를 타고 가던 길이지. 거기가 강가니까 바다 쪽에서 해무(海霧)가 올라와요. 안개가 굉장히 짙게 꼈는데, 차가 가다 서다 한 시간 넘게 밀려서 앞이 완전히 하얘. 그런데 그 안개 속으로 오리떼가 낮게 지나가더라고. 강변 쪽으로 옆으로 흘러가요. 뭐가 움직이나 했더니 — 아, 오리 떼구나. 혼자 앉아서 생각을 한 거지요.
여기서 발상이 한 번에 굴러갔다.
황석영
심심하니까 생각이 굴러요. — 저게 얼른 날아가서 서해 바다로 가겠지. — 그러다가 문득 — 야, 서해 바다가 옛날에 동아시아의 지중해라고 하지 않았나. 옛날 지중해에서 뭐 했지. 오디세우스, 전쟁하러 남자들이 왔다 갔다 했지. 그럼 여기서는 저 길을 몸 팔러 가는 길로 한번 만들어볼까. — 매춘이 언제 생겼는지를 따라가본 거예요. 우리도 유사 매춘, 기생집 같은 게 있었지만 전문적으로 매춘만 하는 업소가 생긴 건 서구 제국주의 이후거든요. 일본을 통해 들어온 일본식 매춘이지. 그러다 심청에 닿았어요. 심청 유사 설화가 서해안이나 바닷가에 전부 있어요. 절과 관계가 있지요. 서해안으로 사라져 돌아오지 않은 소녀들의 위패가 모셔진 절들이 있습니다. 그게 심청 근원 설화라고 옛날에 국문학자들이 많이 발표했어요.
분포가 분명하다고 했다.
황석영
하동포구 80리쯤에도 있고, 무안에도 있고. 황해도서부터 충청도 해변, 전라도 해변, 경상남도 해변까지 쫙 분포돼 있어요. 심청과 유사한 설화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는 거지. 먹고살기 힘들고, 딸내미를 어떻게 하겠어요. 그때 중국 상인들이 무역하러 오잖아요. 그 사람들이 사간 거예요. 공양미 300석을 바다에 제사 지냈다는 건 거짓말이고. 사다가 팔아넘긴 거지.
소설을 위해 두 달 동안 동아시아를 한 바퀴 돌았다고 했다.
황석영
그 취재를 두 달 동안 다녔어요. 중국, 상하이, 대만, 대만에서 또 여러 군데, 그러고 나가사키까지, 한 바퀴 빙 돌고 인천으로 들어왔지. 자료는 오키나와를 포함해 각 나라에서 그 지역 작가들이 다 모아줬어요. 돌아올 때 트렁크 하나가 꽉 찼어요. 대만에서 받은 춘화집이 있었는데, 19세기 초반에 나온 거예요. 거기에 동아시아 전체의 춘화가 다 들어 있어. 옛날에는 포르노가 없었으니까 그림으로 한 거지. 이만한 두께에 크기도 이만한데, 채색화로 아주 근사하게 만들었어요. 중국에서 만든 건데. 재미있는 건, 19세기 청 말기 춘화인데 보면 — 성모 피에타 있잖아요, 예수 안은 마리아 — 그 자세가 다 춘화로 그려져 있어요.
그 책이 결국 누군가에게 도둑맞았다는 일화로 짧게 마무리됐다.
황석영
그게 있었는데, 어떤 놈이 우리 집에 놀러 와서 훔쳐갔어요. 누군지 짐작은 가는데, 아니라고 잡아떼니까 달라고 할 수도 없고.
「심청」을 프랑스에서 출판했을 때 서점 연합 자리에서 한 말도 들려줬다.
황석영
프랑스에서 책이 나올 때 서점 연합장들이 왔어요. 출판사에서 30여 명을 모아놨는데, 서점 주인들 앞에서 얘기를 하다가 예를 들기가 곤란하더라고. 그래서 — 이를테면 심청은 우리나라에서 잔다르크 같은 여성이다. 우리에게는 효와 충이라는 가치가 있는데, 그 충효가 왕조를 떠받치는 이데올로기였고, 한때 독재 정부의 이데올로기로 부활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소설은 그 잔다르크를 매춘부로 만든 소설이다 — 그랬더니 그게 충격이었어요.
자기 작품을 외국 독자에게 전할 때 무엇을 잡고 무엇을 풀어줘야 하는가 — 잔다르크라는 한 단어로 압축한 그 자리에 황석영의 외방 얘기꾼다움이 보였다. 자유로의 안개 속 오리떼 한 무리에서 시작된 발상이, 동아시아 지중해를 가로질러, 충청·전라·경상 해변의 위패들과 만나고, 19세기 청 말기 춘화집을 거쳐, 파리의 서점 주인 30명 앞에서 잔다르크라는 단어 하나로 도착했다. 쨍쨍한 과거가 한 편의 소설로 만들어지는 그 길의 정확한 지도였다.
7. 혼자 가겠다 — 번역의 정치
번역 정책 얘기는 길었다. 어쩌면 가장 길었다. 거의 싸워오면서 지나온 세월이라는 게 선생의 첫마디였다.
황석영
사실 이쪽하고 거의 싸워오면서 지나온 세월이에요. 그러면서 조금씩 변하기는 했지만 크게 변한 건 아닙니다. 천천히 변했지요. 처음에 — 번역원이 생기기 전에는 문예진흥원이라는 게 있었어요. 군사정권 때 만들어진 기관이지요. 문화부에서 퇴직하는 관료들이 마지막을 정리하는 자리로 문예진흥원에 가서 한 자리씩 차지하곤 했어요. 그 기금이 어디서 났느냐 하면, 극장 티켓 값에서 몇 퍼센트를 문예진흥 기금으로 떼어내게 만들어놨어요. 그래서 돈이 많았습니다. 눈먼 돈이지. 김대중 정부 때 감사를 해보니, 돈을 마음대로 쓴 거지. 극장 수입 대부분을 공무원을 유지하는 데 썼고, 지원은 자기네 말 잘 듣는 사람들 중심으로 했어요.
번역이 어떻게 시작됐는가 하는 대목에서 헛웃음이 났다. 쾰른의 어느 인쇄소 비슷한 데에 한국 작가들이 가짜 출판사 등록을 낸 일이었다.
황석영
쾰른 어디에 — 자기가 잘 가던, 명함도 찍어주고 문구도 취급하는 조그만 인쇄소 비슷한 데가 있었어요. 주인이 유대인이었지. 그 친구와 짜고 출판사 등록을 냈어요. 한국에만 그게 알려져 있어요. 그 이름으로 거기서 에디터도 없이 그냥 찍어서 낸 거지. 신청해서 천 권 찍고 한국에 갖다놓고 — '독일에서 출판했다' — 그러면 한국 신문에 대문짝만 하게 났어요. 별의별 사람들이 다 거기서 책을 냈어요. 내가 망명해 있던 시절이지.
전환점은 김대중 정부였다고 했다. 그러나 그 안에서도 문제는 계속됐다.
황석영
김대중이라는 양반이 대단해요. 망명을 했으니까 문화적 소양이 있는 거지요. — 디지털로 가야 한다 — 그것부터 시작했지만 번역원도 있어야 한다고 봤어요. 자기가 노벨상도 받았으니까. 그래서 번역원을 만들어놨는데, 처음에는 독문과 교수가 운영을 했어요. 그게 프랑크푸르트 도서전까지 갔지요. 번역이 엉망이지요. 사실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은 좀 연기를 했어야 했어. 그런데 그 욕심쟁이들이 100권을 번역한다고 돈을 풀어서, 팸플릿처럼 돼버린 책들을 백 권 만들어 내보냈어요. 우리는 그 사정을 다 알잖아요. 이런 식으로는 안 된다. 시장에, 서점에 우리 책이 한 권도 꽂혀 있지 않으니까. 왜 그러냐. 출판사가 시장으로 나가야지요. 시장을 통해서 독자를 만나야지. 대학 교수 세미나장에서 만나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선생은 혼자 가기로 했다.
황석영
한국에서 번역 후보작을 심사한다는 게 다 대학교 영문과, 불문과, 독문과 교수들이에요. 그 사람들이 뭘 알아. 텍스트만 읽고 결정을 하는 거지. 안 되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 나는 혼자 가겠다. 너희들 하고 상관없이. 너희들은 지원만 해줘라. — 그렇게 결심하고 밖에서 에이전트를 찾았어요. 나는 좀 알려져 있었고 망명한 이력도 있고 그러니까 다 지켜보고 있었을 거 아닙니까. 에이전트가 붙었어요. 처음에는 프랑스 에이전트 회사가 붙었지. 「병 속에 쓴 편지」가 그 회사예요. 프랑스 에이전트라 처음부터 좀 불리했어요. 영어권에 붙었으면 훨씬 좋았겠지만. 거기서 출판사 몇 군데에 원고를 보내면 그쪽에서 텍스트를 고르는 거예요. 번역된 문장도 — 이건 틀렸고 이건 맞다 — 그렇게 골라지는 거지. 대학 교수들이 심사하는 게 아니라, 책을 팔아야 하고 만들어야 하는 현장의 편집자가 보고 — 이건 책이 되네, 이 문장은 안 되네, 쓰레기통 — 그렇게 결정되는 거예요. 한국에서 번역 문학상을 받았어도 거기서는 그냥 쓰레기통으로 들어가는 거지. 이걸 고쳐야 한다. 국내 심사 제도를 다 없애고 출판 현장의 편집자가 결정하도록 하고, 텍스트도 에이전트가 사가도록 해야 한다. 한국 문학 초창기니까 외국 사람들은 한국 문학에 뭐가 있는지 모르잖아요. 그래서 그렇게 가야 한다고 본 거예요. 나 혼자 시작해서 성과를 봤습니다. 거기까지 10년이 걸렸어요.
번역 인구가 얼마나 부족한지, 일본·중국과 비교가 따라왔다.
황석영
에이전트 제도로 넘어오는 게 또 시스템 문제예요. 기존 사람들을 다 내쫓을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대부분의 경우 외국인 배우자를 둔 부부가 번역을 했어요. 그러다 전문 번역가가 붙기 시작했는데, 지금도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일본이나 중국은 번역할 수 있는 인구가 수십만 명인데, 우리는 유능한 인구가 몇십 명 정도예요. 손가락에 꼽을 정도지요. 그나마도 업으로 삼지 않아요. 간헐적으로 하다 말다 하다 말다 합니다. 왜냐. 돈이 충분히 안 되니까. 일본은 엄청나게 공을 들였고, 중국은 공자학원이 생긴 다음에 아주 저돌적이고 공격적으로 우리를 덮어버렸지요. 돈을 풀어 제일 좋은 거리에 문화원을 차리고. 지금은 많이 탄로가 났지만, 그때는 굉장히 공격적이었어요. 일본은 한 100년 됐으니 우리하고 비교할 수 없고.
그러나 한국의 변화가 짧은 시간에 일어났다는 자긍심도 있었다.
황석영
무서운 건 우리가 이렇게 변하는 데 20년밖에 안 걸렸다는 점이에요. 내가 이걸 시작하고 나서 이만큼 변하는 데 한 20년 됐어요. 그 사이에 한국 문학이 굉장히 유니크하다는 사실을 온 세계가 알게 됐어요. 다양하다는 것도. 어떻게 작가들이 이렇게 다양하게 읽힐 수가 있느냐. 다양한 세계가 있다는 것. 알고 보니 그 전에 쌓인 전통도 엄청나다는 것. 한국 문학의 전통이 그렇다는 걸 서구 문학이 이제야 안 거예요. 그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 보니까 20세기 초반 아일랜드 시문학 같은 유니크함과 깊이가 너희들한테 있다, 그런 감동이 있다 — 이렇게 평가를 하는 거예요.
여기서 한 줄이 따로 떨어졌다. 한강의 노벨상에 대한 자리매김이었다.
황석영
그래서 가령 한강의 노벨상 수상은 — 한강은 한국 문학의 안티고네다, 이렇게 얘기를 하지요. 피와 고통을 어루만지면서, 그것을 세계 문학이 인정한 거지요. 수난받은 자가 극복해 가는 과정을 본 거예요. 그러나 아직 멀었어요. 아직 멀었어.
아직 멀었다는 말이 가볍지 않게 들렸다. 한 작가가 20년의 자기 싸움 끝에 도달한 자리에서 다시 출발선을 가리키는 어조였다.

8. 칸막이를 부수고 — 「칼라」와 문화도시
레지던시 얘기가 나왔을 때 선생은 거의 동시에 같은 말을 했다. "아이고 나하고 생각이 똑같아." 미술 쪽에는 레지던시가 많은데 문학 쪽에는 드물다, 그리고 같은 종류만 모아두는 건 재미가 없다는 게 내가 꺼낸 얘기였다. 음악 미술 영화 문학이 한 자리에 섞여야 한다고 했더니, 선생은 곧장 47그룹 모델을 끌어왔다.
황석영
내가 옛날부터 47그룹처럼 가야 한다고 봤어요. 독일에 47그룹이 있었지요, 2차 대전 끝나고. 그 작가들이 무슨 조직을 갖춘 게 아니라, 문화 정책이나 사회 현상에 대해 발언할 때 모여서 — 이 발언을 함께하자 — 할 때 참가할 사람은 참가하고 빠질 사람은 빠지고, 마음대로 하는 거지요. 그런 식으로 가야 한다. 그러니까 옛날 저항 단체들 — 작가회의니 뭐니 하는 것들 — 이걸 해소하고 그쪽으로 가야 한다. 그리고 장르를 다 합쳐서, 음악과 미술과 영화와 문학을 묶는 그룹을 만들자. 그런데 문단에서는 안 먹혔어요. 영화계가 그걸 받아들여서 영화인과 문학인 모임을 자주 가졌지요. 차승재가 그걸 받아서 했어요. 그래서 영화 쪽하고 친해진 거지. 지금 장르 문제도 그렇고, 레지던시도 그렇게 종합적으로 가야 합니다.
칸막이가 한국에 너무 단단하다는 진단이 따라왔다. 옛날에 김수영이 시나리오를 썼다는 이유로 문단에서 가외로 취급받았던 일을 선생은 기억하고 있었다.
황석영
우리나라처럼 칸막이가 엄정한 데가 없어요. 옛날에 김수영이를 문단에서 가외로 취급하고 제외시킨 일이 있어요. 시나리오를 썼다고 영화 쪽으로 넘어갔다는 거지. 웃기는 얘기예요. 우리가 방송국 대본이나 영화 대본을 쓰면 — 타락이다. 본격 예술에서 타락했다 — 이렇게 됩니다. 지금도 그래요. 그런 엄정함이 있어. 장르를 넘나들지 못하게 하는 게 있다고. 심지어 소설가가 시를 써도 외도한 것처럼 말하던 시절이 있었어요. 사실 만화 콘티도 짤 수가 있는 거고요. 외국 작가들은 자유롭게 넘나듭니다. 벌써 오래된 얘기예요.
칸막이는 장르 사이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작품을 둘러싼 한국 사회 안에서, 「심청」 연재 도중에는 청송 심씨 후손들이 들고 일어났고, 한승원의 「아제 아제 바라아제」는 조계종에 고소를 당했다.
황석영
심청이 효의 상징처럼 굳어진 걸 제일 먼저 패러디로 뒤집은 게 채만식이에요. 채만식의 「심봉사전」이 있어요. 심청전이 아니고 심봉사전이지. 뺑덕 어미가 — 네 딸 돌아왔다 — 하고는 유곽 작부를 하나 데려와 만져보게 합니다. — 눈을 떠보니 카니발이 왔다 — 뭐 그런 식이에요. 그렇게 패러디로 뒤집은 거지. 그런데 재미있는 건, 내가 「심청」을 연재하던 중에 청송 심씨 종친회한테 고발을 당했어요. — 심씨를 모욕했다 — 그러니까 한국일보가 대응을 했지. 나는 나서지도 않았어요. 한국일보에서 — 그거 소설이지 않으냐, 심청이가 청송 심씨라고 어디에 적혀 있냐 — 이렇게 받아쳐서 유야무야됐지만, 가십 기사가 크게 났어요. '청송 심씨가 고소했다'고. 어이없는 일이지요. 한국이 그런 나라예요. 한강의 아버지 한승원이 「아제 아제 바라아제」를 써서 영화로도 만들어졌잖아요. 그것 때문에 조계종에 고소를 당했어요.
장르의 칸막이가 한 작가를 가두는 일도, 종친회나 종단이 한 작품을 고소하는 일도, 다 같은 종류의 부조리라는 것이 짧게 흘러갔다. 그러더니 광주에서 들었다는 웹소설 일화로 흐름이 바뀌었다.
황석영
광주에 가서 처음 들은 얘기인데, 요즘 흐름을 잘 몰라서 흥미로웠어요. 한 달에 3천만 원을 번다는 웹소설 작가가 있다더라고요. 무슨 얘기냐 하면, 현대의 외과 의사가 화타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서 화타가 된다는 거예요. 한참 그러다가 다시 현대로 돌아와 외과 의사가 되는 얘기를 쓴대요. 한 달에 3천만 원씩 번다고. 웹소설이라는 것도 사실 굉장히 가능성이 큰 영역이거든요. 그런 걸 가리면 안 됩니다.
군산에서 한 독립 출판 북페어 얘기도 그 맥락이었다.
황석영
작년에 한 청년이 밖에서 제안을 들고 들어왔어요. 독립 출판사와 독립 서점들이 많이 생겼으니, 그 사람들 위주로 북페어를 하자는 거지요. 그래서 군산에서 했어요. 굉장히 성공적이었습니다. 돈도 거의 안 들었어. 시청 사람들은 그게 뭔지도 몰랐고요. 조그만 독립서점 주인들이 자기들끼리 주머닛돈을 털어서 1회를 열었는데, 일본에서도 오고 대만에서도 왔어요. 독립 출판과 독립 서점은 이미 전 세계적인 현상이거든요. 요즘은 다 인터넷으로 알려지니까. 성황리에 진행됐어요. 사람들이 목말랐던 거지요.
군산은 그 칸막이를 부수려는 실험이었다. 「칼라」는 군산의 옛 일제 전기 회사 건물, 농협 창고 다섯 채, 비어 있는 옛 영화관 같은 근대 건축물을 살려 미술관·공연장·독립영화관으로 이어붙이는 그림이었다.
황석영
내가 「칼라」를 하게 되면 — 저게 옛 남조선 전기 건물이거든요. 그런데 저거 참 웃긴 게, 문화재청 소관인데 허물어지게 생겼으니 외부만 수리를 한 거예요. 지나다니는 사람들한테는 '문화재입니다, 일제 시대 전기 회사입니다'라는 팻말만 보여주고 끝이지. 그래서 내가 물어봤어요. 저 공간을 왜 그냥 두냐. 안을 손보면 미술관으로 쓸 수 있잖아요. 근대 거리를 구경하러 온 사람들이 들어가 현대 미술을 볼 수 있잖아. 근사한 미술관이 될 자리예요.
비어 있는 영화관, 그리고 식민지 쌀 수탈 체험관 얘기로 이어졌다.
황석영
그 아래에도 비어 있는 건물이 하나 있어요. 옛날 영화관이었던 데. 한 300석쯤 됩니다. 그대로 비어 있어요. 다 허물어지게 생겼어. 독립영화관과 예술영화관이 전국에 50개밖에 없습니다. 중소도시에는 거의 없어요. 그게 있어야 독립영화가 발전하고 예술영화가 돌아갈 거 아닙니까. 군산 시민들은 독립영화 보러 전주로 갑니다. 전주에 하나 있으니까. 군산에 멀쩡한 극장이 있는데 그렇게 다 비워두고 있는 거지요. 그 앞에 문화콘텐츠진흥원하고 군산시가 합작해 만든 건물이 또 있어요. 위에 양곡 배급 공단이라는 건물이지. 쌀 수탈하던 기관이었어요. 그것을 '식민지 쌀 수탈 체험관'으로 만들어놨는데, 들여다보면 환등기처럼 사진만 돌아간대요. 팻말만 세워놓고 있어요 — '여기 이런 것이 있었다.' 기계만 사다 놓고 관객이 안 오니까. 이런 걸 다 활성화해야 되는 거지요. 일이 살아서 돌아갈 거 아닙니까. 「칼라」를 하게 되면 이런 걸 다 제안하려고요. 이거 다 살리자. 그러면 그대로 쓸 수가 있잖아요.
해외 작가 교류 얘기도 같은 자리에서 나왔다. 한국 작가가 외국에 나가는 지원만이 아니라 외국 작가가 한국에 들어오는 지원도 늘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라고 말했더니 선생이 곧장 받았다.
황석영
아, 그럼요. 그거 우리가 그 전에 했어요. 우리하고 친한 정권이었을 때. 노무현 정권 시절에 그런 때가 있었지요. 그게 정말 좋았어요. 그때 인연을 맺은 작가들 중에 출세한 작가들이 여럿 생겼어요. 이를테면 아다니아 시블리 같은 팔레스타인 작가. 그 친구가 지금 베를린에 있는데,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최고상을 받기로 했다가 반유대주의 논란 때문에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 같은 보수 쪽에서 들이대서 취소가 됐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광주로 불러다가 아시아 문학상을 줬어요. 아메리칸 북 어워드에도 올랐고. 그런 친구. 아룬다티 로이도 한국과 인연이 있었던 작가지요. 그에게도 문학상을 줬고. 그런 사람들이 와서 우리하고 인연을 맺고, 지금 한참 잘 나가는 중견 작가들을 불러다가 인연을 맺어 다시 내보내고. 그게 좋은 일이에요. 그런 게 문화 교류예요. K-팝 같은 것만 신경을 쓰지 말고요. 문학은 그 사회의 오피니언 리더들에게 직접 영향을 주는 겁니다. 그걸 몰라요.
군산이 안 되면 인천도 검토 중이라고 했다. 다만 어디로 가든 정권이 바뀔 때마다 흔들리지 않는 자리가 필요하다는 게 결론이었다. 부산국제영화제처럼 자리를 잡아야 한다, 전주국제영화제처럼 시장이 바뀌어 휘둘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짧게 덧붙였다. K-문명도, 문화도시도, 결국 정권 너머의 시간을 견디는 구조의 문제로 수렴됐다. 「칼라」는 그 구조를 한 도시 안에서 만들어 보겠다는 시도다. 그게 군산이 안 되면 인천에서, 인천이 안 되면 또 다른 어디에서.
9. 한 작가의 형성 — 두 번의 가출, 사이에 놓인 60년
이 자리에 학창시절 얘기가 끼어든 것은 우연이었다. 정확히는 선생이 예술 교육의 한국적 한계를 얘기하다가, 그렇게 생각하게 된 출발점으로 슬쩍 들어간 것이다. 선생은 사실 예술 교육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고 했다. 음악이나 미술처럼 도구와 기술이 필요한 장르는 어쩔 수 없겠지만, 문학은 경제학을 공부해도, 다른 공부를 해도, 결국 글로 돌아온다는 것이었다. 그 얘기 끝에 자기 자신을 불러왔다.
황석영
옛날에 한 번 잘못 얘기했다가 곤혹스러운 적이 있어요. 어느 청중이 — ‘왜 문창과 안 나오고 철학과를 다녔냐’ — 묻길래 이렇게 답했어요. 사실은 고등학교 때 공부도 안 하고 가출해서 떠돌고 그러는 바람에 성적이 좋지 않았어요. 대학을 갈까 말까 하다가, 우연히 어떻게 들어가게 된 게 그 학교예요.
상도동 화장실의 그 아침 얘기였다.
황석영
내가 상도동 사람인데, 가출해서 밖으로 떠돌다가 1년 만에 집에 돌아왔어요. 어느 날 화장실에서 이를 닦다가 창 밖을 보니 등교하는 학생들이 지나가더라고. 부러웠어. — 아, 쟤네들은 학교 가는구나. — 건너편을 보니 대학이 하나 있어요. 그게 숭실대학이에요. 그때가 5월이었지.
이미 입학식이 한참 지난 5월이었다. 선생은 그 길로 학교를 찾아갔다. 사상계 신인상을 받은 이력이 있었다.
황석영
야, 저기가 괜찮지. 저기 철학과가 괜찮다는 얘기가 있고, 거기 선생들이 좋은 사람이 많아요. 최명관, 조요한, 고범서, 안병욱. 내가 사상계 신인상을 받은 뒤니까 그 편집위원들이 거기 다 있더라고. 그래서 — 저기를 한번 들어가볼까 — 하고 찾아갔어요. 철학과 교수실에 보니 조요한이라고 써 있어. 그냥 그 문을 두드렸어요. 들어가니까 학생인 줄 알고 — '누구신가' — 묻길래 — '제가 누구 누구인데, 사상계에 입선도 했고' — 그러니까 다 기억하더라고요. — '그렇게 대학 갈 기회를 놓쳤는데 여기 다닐 길이 없겠습니까, 그래서 왔습니다' — 그랬더니 앉으라고 해서 두 시간을 얘기했어요. 내가 답을 하면 대화가 되니까, 조 선생이 굉장히 재미있어 했어요.
한 주 뒤 다시 오라는 말을 들었고, 그날의 점심자리가 곧 면접이 됐다.
황석영
한참 얘기하다가 끝나고 가면서 — '아니, 무슨 배짱으로 입학식도 다 지났는데 찾아와서 그러나' — 그러더니 — '내부에서 의논을 좀 해볼 테니 다음 주에 한 번 와봐라' — 그래서 다시 갔어요. 점심을 같이 먹자고 구내식당에서 먹고 어디론가 데려갔는데, 가보니 거기 다 모여 있어요. 학과 교수들이 둘러앉아 면접을 본 거지요. 질문하면 대답하고 또 질문하면 대답하고. — '다녀라' — 그래서 숭실대 철학과를 시험도 안 보고 들어갔어요.
1년 반쯤 다녔다고 했다. 그러다 신체검사 통지를 두 번 무시했다.
황석영
한 1년 반쯤 다녔나. 그러다가 그때는 적령기가 되면 신체검사 통지가 나오는데, 두 번 안 가면 그 다음에는 잡으러 와요. 두 번 다 안 갔더니 형사가 집으로 찾아왔어요. 그때 대방동에 살았는데, 동네에 해병대 모집 벽보가 붙어 있더라고. 한 달에 한 번씩 모집을 하잖아요. 그래서 — '저걸 가야겠다' — 후암동에 있던 해병대 사령부에 찾아가서 신청을 했지. 신체검사를 받았어요. 한참 운동할 때라 몸이 좋아서 보충 합격으로 금방 붙었어요. 그래서 해병대를 갔지요. 가니까 베트남 파병이 돼서 베트남까지 끌려갔어요.
미스코리아 선발하듯 줄을 세워 헌병대로 뽑힌 일도 그 자리에서 들었다.
황석영
가서 군악대, 헌병대, 의장대 셋을 뽑아요. 맨 앞에서 미스코리아 선발하듯 쫙 뽑아 갖고. 제식훈련을 시켜요. — '앞으로 가, 뒤로 돌아, 오른편으로 돌아, 왼편으로 돌아' — 몇 번 시킨 다음에 — '너 나와, 너 나와' — 그냥 헌병대로 뽑힌 거예요. 그래서 진해 헌병대로 가서 사거리에서 교통 정리도 하고 — '대통령이 잘한다'고 칭찬도 받았는데 — 남문 근무를 하라고 해서 거기 통제부 사령부, 해군 사령부, 함대 사령부가 있는 남문에서 근무를 했어요.
베트남에서 돌아온 다음에는 숭실대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동국대로 옮겼다. 그 집안 내력이 얘기 안에 자연스럽게 들어왔다.
황석영
베트남에 갔다 온 뒤에 숭실대 철학과를 다니기가 힘들었어요. 거의 신학교 분위기였거든요. 거기가. 채플이 엄청났어요. 우리가 이북에서 내려왔잖아요. 숭실전문이 원래 이북에 있던 학교라 우리 모친이 잘 알아요. 모친이 목사님 따님이거든. 외할아버지가 감리교회 목사였어요. 신사참배 반대로 옥살이도 하셨던 분인데, 김일성 아버지하고도 잘 아는 사이였지요. 김일성도 알았고. 전은걸 목사라고 있어요. 3·1운동 때도 우리 집안이 주동을 했고, 원래 동학을 하시던 양반이 선교사를 만나 그쪽으로 길이 트인 거예요. 외할아버지가 그러신 분이지. 그런데 학교에서 채플 시간을 출석으로 체크하고 그래요. 빠지면 표시를 하고. 월요일 조회하듯이 체크를 합니다. 그게 신학교 분위기처럼 억압적이고 싫었어요.
그래서 한참 뒤 이태리에서 받은 종교 질문에 대답한 한 줄도 같이 흘러나왔다.
황석영
그래서 나는, 나중에 커서도 — 이태리 만토바 문학제에서 「손님」으로 행사를 하는데 청중 가운데 하나가 — '너 종교가 뭐냐' — 묻는 거예요. 거기는 종교적 갈등이 있는 곳이잖아요. 공산당도 있고 로마 가톨릭도 있고. 그래서 — '나는 종교가 없다' — 그러면서 단서를 달았어요. — '누가 와서 종교를 안 가지면 죽이겠다고 총을 갖다 대면, 그때는 불교를 선택하겠다' — 그렇게 답했지. 그런 심정이 있거든요.
그러더니 동국대로 옮긴 일을 짧게 말했다.
황석영
또 집에서도 어머니가 지독한 목사 따님이니까. 그 반동도 있어서 베트남에서 돌아온 뒤에 대학을 옮겼어요. 그때 홍기삼이 — 학부생 주보를 만들고 있었나, 나중에 동국대 총장이 된 사람인데 — 나한테 잘했어요. 후배라고. — '여기 동국대 다니라고' — 그래서 동국대로 옮겼어요. 그것도 한 1, 2년쯤 다니다가 때려쳤지.
이 학창시절 일화가 인상 깊은 것은, 그것이 78세의 두 번째 가출과 거울처럼 마주 서 있기 때문이다. 1년의 가출 끝에 우연히 들어선 숭실대 철학과의 출발 — 그리고 60년 가까이 지난 뒤, 일산 집을 떠나 트렁크 두 개를 들고 익산 원불교 레지던스로 들어가 「철도원 삼대」를 쓴 78세의 선택. 두 번 다 가출이고, 두 번 다 글로 가는 길이었다. 출발에 우연이 있었다면 끝에는 결심이 있었다. 그 사이에 베트남이 있고, 광주가 있고, 베를린이 있고, 평양이 있고, 만토바가 있다. 외방 얘기꾼의 동선이라는 것이 이렇게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 동선의 마지막 자리에서 외방이 토박이 쪽으로 천천히 돌아오는 중이라는 것을, 4번 섹션의 자기 정의가 이미 가리키고 있었다.
10. 백척간두 진일보 — 원로작가의 자리
박범수가 마지막 무렵 라이벌을 다시 물었다. 동시대 외국 작가 중 동료라고 느끼는 사람이 있는지. 선생은 동시대 한국 작가들부터 짧게 호명하고 시작했다.
황석영
별로 없어요. 서로 너무 달라서. 작가한테 물어보면 작가가 답하기가 굉장히 곤란합니다. 게다가 동료 작가들은 거의 다 죽었어요. 나하고 친하던 사람들은 다 갔지요. 이문구, 조세희 — 조세희도 참 좋은 작가인데 많이 쓰지는 않았어요. 김지하도 좋은 작가고 좋은 시인이고.
그러더니 외국 윗세대 얘기가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귄터 그라스(1927) - 오에 겐자부로(1935) - 황석영(1943) 사이의 정확한 8년 차.
황석영
외국에도 내 또래에 남은 사람이 별로 없어요. 나는 윗세대하고 친했어요. 가령 귄터 그라스 — 거의 16년 연상이지요, 일본의 어느 평론가가 '전쟁 삼형제'라는 말을 만들었는데, 우리가 거기에 끼어 있었어요 — 귄터 그라스, 오에 겐자부로, 황석영. 2차 대전, 태평양 전쟁, 베트남 전쟁과 한국 전쟁. 전쟁의 3세대다, 그렇게 부른 거지요. 8년 차예요. 나보다 8년 위가 오에 겐자부로, 그보다 8년 위에 귄터 그라스가 있어요.
그리고 좋아하는 작가들 이름이 줄줄이 나왔다.
황석영
그런데 로맹 가리 같은 작가가 참 좋고. 그렇게 좋아해요. 마르케스도 물론 좋고, 보르헤스도 좋고. 내 또래에 살아 있는 사람으로는 이사벨 아옌데가 있어요. 이사벨 아옌데가 나보다 두 살, 아니 지금 82세쯤 됐을 거예요.
그러나 곧장 80대 작가들의 절필 얘기로 흐름이 옮아갔다.
황석영
서양 작가들은 대개 80대 초반에 절필을 해요. 마르케스도 81세에 절필했고, 필립 로스도 81세, 오에 겐자부로도 81세. 다 그 무렵에 — 아, 그만 쓰겠다 — 그러더라고요. 아니면 옛날에는 자살하거나 죽거나 그랬어요. 로맹 가리도 권총 자살을 했지요. 그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기 매너리즘하고 싸운 거예요. 사실은. 원로 작가라는 자리 자체가 리스크예요. 동어 반복은 할 수 없잖아요. 그런데 해놓은 건 많잖아. 그러면 거기서 한 발 더 나가야 되는데. 이게 백척간두 진일보예요. 백 척 끝에 서서 한 발 더 내디뎌야 한다는 거. 그러니까 소박하고 정직하고 성실하게 가서 — 아, 이제 그만 쓸래 — 하는 게 정직한 태도이고, 자살하는 게 조금 과격한 태도지요.
(정확히 따지면 마르케스의 마지막 소설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은 2004년 77세 무렵, 필립 로스의 절필 선언은 2012년 79세 즈음, 오에는 「만년양식집」을 78세에 냈다. 숫자는 약간씩 어긋난다. 그러나 선생이 81세라는 한 자리에 셋을 모은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게 원로 작가의 한계선처럼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톨스토이의 가출은 다른 종류였다.
황석영
톨스토이의 경우는 82세에 가출을 해요. 왜? 그래야 새 작품을 쓸 수 있을 것 같으니까.
그리고 곧장 자기 얘기로 넘어왔다.
황석영
저도 78세에 가출을 했어요. 트렁크 두 개를 들고. 일산에서. 그래서 익산 원불교 레지던스에 들어가 「철도원 삼대」를 썼어요. 「수인」도 같이. 2017년에 「수인」이 나오고 나니까 간이 다 빠져나간 것 같더라고요. 그때 절필 선언을 했더라면 지금 행복하고 안전한 노년을 보냈을 거예요. 돈도 많이 벌어놓았고. 그래도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수인」에 대해서는 후회가 많이 남는다고 했다. 자서전은 작가의 영토가 아니라는 게 선생의 자리였다.
황석영
그건 옛날에 돈 받아먹은 것 때문에 할 수 없이 쓴 거예요. 쓰고 나서 얼마나 후회를 했는지. 작가가 자서전 같은 걸 쓰는 게 아니거든요.
박범수가 식민지 출신 작가 중에 라이벌처럼 느끼는 사람이 있는지 한 번 더 물었다. 선생은 응구기 와 시옹오와 살만 루슈디를 길게 얘기했다.
황석영
옛날에 식민지였던 아시아나 아프리카 작가들이 있는데 서로 달라요. 응구기 와 시옹오 같은 작가는 오랫동안 망명해서 그냥 미국 작가가 돼버렸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건 근년에 와서 케냐 토속어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그게 대단한 일이지. 책이 나오면 그걸 영어로 번역해요. 대단한 거지. 다시 자기를 회복해서 돌아간 거예요. 응구기 와 시옹오를 보고 참 근사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다음이 살만 루슈디예요. 이슬람을 잘못 건드렸다가 평생을 암살 위험 속에서 살았어요. 편집자들도 많이 죽었어요. 전 세계 편집자들이 여러 명 암살을 당했지요. 그래도 본인은 살아남았는데, 결국 마지막 테러를 당해서 스무 몇 군데를 칼로 찔렸어요. 성도 완전히 사라지고, 한쪽 눈은 멀고, 거의 죽다 살아났어요. 그 한쪽 눈을 가지고 살아난 사람이 「나이프」라는 소설을 썼습니다. 대단해요. 옆에서 보살펴주는 아주 좋은 여성도 한 사람 만났고. 그 「나이프」를 보면 — 용서하지는 않지만 증오하지도 않는다 — 그렇게 결론을 내려요. 자기를 찌른 그 청년을. 대단히 용기 있고 대단한 작가다 싶어요. 어떤 문학상보다도 그 인생 자체가 대단해. 초창기 「한밤의 아이들」 같은 작품도 걸작이거든요. 그런 라이벌들이 있지요. 그러고 보니까 그러네요.
박범수가 공통점을 짚었다. 다 옛날에 식민지 출신이라는 것. 선생이 짧게 받았다.
황석영
그렇죠. 그런 걸 극복해 나가는 거죠. 세계 속에서.
원로작가의 자리에서 살아남는 한 가지 방식이 거기 있는 것 같았다. 용서하지 않으면서 증오하지 않는 자리. 백척간두 위에서 한 발 더 나가는 자리. 식민지였던 자기 자리에서 다시 자기 토속어로 돌아오는 자리. 그리고 그 자리에서 다음 작품을 향해 카자흐스탄으로 출발하는 자리.

5월 12일 카자흐스탄 출발이 보름쯤 남아 있었다. 만년의 홍범도와, 18년을 끌어내려 그 옆에 앉힌 청년이 거기서 어떤 일상을 보낼지는 아직 글이 되지 않은 채였다. 동학의 최보따리를 쓸지, 칭기즈칸의 변화를 쓸지도 망설임 안에 있었다. 망설임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김애란 작가가 말했다고 한다. 그 말은 맞을 것이다. 적어도 이 자리에서는 분명히 그렇게 보였다.
상도동 화장실 창에서 등교하는 학생들을 보며 부러웠다는 1년 가출의 청년이, 78세에 트렁크 두 개를 들고 다시 가출해 「철도원 삼대」를 썼고, 이제 83세에 다시 카자흐스탄으로 출발한다. 다시 시작하는 작가의 다음 한 걸음은 아직 카자흐스탄 어느 도시 위에 있다.

김재준 편집장
국민대 명예교수
전) 한국예술경영학회 2대 회장
전) 한국문화재정학회 회장
전) 국민대 박물관장, 도서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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