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박이의 깊이에서 K-문명까지, 황석영이 그리는 한국 문학의 미래




유목민들을 전부 연합시켜 갖고. 그 사람들 방식은 공포를 주는 거예요. 가서 — 너희 항복해 — 선포해 놓고, 말 안 듣고 저항하면 사흘 동안 짐승, 닭 한 마리까지 남기지 않고 싹 쓸어버리거든요. 그러다가 이슬람 쪽으로 갔을 때 유명한 일화가 하나 있어요. 그 이후로 칭기즈칸이 변합니다. 자료가 지금 아물아물한데, 어느 성을 포위했을 때 그가 생각을 바꿔요. 점령한 뒤에 한 사람도 죽이지 않는다는 거지. 종교인은 종교인 그대로, 기술자는 기술자 그대로 다 받아들여. 거기가 오아시스 도시 중 하나인데, 그걸 다 흡수해버린 거지. 그 방식이 이후 제국 건설의 기초가 됩니다. 그 변화의 자리. 그 성 이름이 지금은 안 떠오르는데, 그 전투가 아주 재미있어요. 그래서 그걸 두 달 동안에 — 칭기즈칸의 변화와 그 성을 점령하는 과정을 — 한 5, 6백 매짜리로 한번 써볼까 하는 생각도 있어요.

유목민들을 전부 연합시켜 갖고. 그 사람들 방식은 공포를 주는 거예요. 가서 — 너희 항복해 — 선포해 놓고, 말 안 듣고 저항하면 사흘 동안 짐승, 닭 한 마리까지 남기지 않고 싹 쓸어버리거든요. 그러다가 이슬람 쪽으로 갔을 때 유명한 일화가 하나 있어요. 그 이후로 칭기즈칸이 변합니다. 자료가 지금 아물아물한데, 어느 성을 포위했을 때 그가 생각을 바꿔요. 점령한 뒤에 한 사람도 죽이지 않는다는 거지. 종교인은 종교인 그대로, 기술자는 기술자 그대로 다 받아들여. 거기가 오아시스 도시 중 하나인데, 그걸 다 흡수해버린 거지. 그 방식이 이후 제국 건설의 기초가 됩니다. 그 변화의 자리. 그 성 이름이 지금은 안 떠오르는데, 그 전투가 아주 재미있어요. 그래서 그걸 두 달 동안에 — 칭기즈칸의 변화와 그 성을 점령하는 과정을 — 한 5, 6백 매짜리로 한번 써볼까 하는 생각도 있어요.

그런 게 다 지금 이 운명의 전환기를 보면, 다 그 생각들이에요.


중국 것도 있고 신화 설화집이 많아요. 동북아 설화가 샤먼 쪽에 남아 있는 게 재미있는 게 많습니다. 엊그저께 광주 갔다가 — 내가 괜찮은 인물들은 따로 챙겨두고 인적으로 관리를 하거든. 개인적으로. 그중에 하나가 이병한이에요. 유라시아 기행문도 쓰고, 요새는 중국이니 미국 기술 상황이니 하는 책을 쓰는 친구. 원광대에 있다가 광주 GIST로 갔어요..

맞아요, 맞아. 요새 여기저기 떠드는 철학자, 평론가들도 그렇고, 전부 외국 이론, 외국 철학이야. 그게 한계거든요. 좀 자기 목소리를 자기에 근거해서 했으면 좋겠어요.

한국 무속, 동학 — 이런 데에 엄청난 잠재력이 있어요. 정말입니다. 우리가 부끄럽게 여기는 그것에. 지금 시대가 바로 그런 걸 요구하고 있어요. 전 세계가. 내가 「칼라」를 하려고 하는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입니다.


얘기꾼에는 토박이 얘기꾼과 외방 얘기꾼이 있어요. 토박이는 동네에 내려오는 전설이나 비밀을 간직했다가 후대에 전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위로부터 들은 것에 자기가 새로 덧붙이기도 하고. 그 동네에 가령 삼돌이가 왔다 갔다 하면 — 아, 저놈이 왜 태어났느냐, 몇 년 전에 소금장수가 지나가다가 이쁜이를 만나 물레방아에서 눈이 맞아가지고, 소금장수는 사라지고 저놈이 남은 게 삼돌이다 — 라든가. 저 버드나무는 몇 년 전에 벼락을 맞아 한쪽이 찌그러졌다든가. 그런 것들을 간직했다가 전해주는 게 토박이지요. 외방 얘기꾼은 자의로든 타의로든 쫓겨나서든,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올라간 사람이에요. 자기 고향 얘기에 허풍을 덧붙이지. — 야, 우리 고향에는 배하고 사과하고 복숭아가 한 나무에 같이 열린다 — 그러고. 또 돌아와서는 — 야, 서울 남대문이 얼마나 높은지 구름이 걸려 있고 사람이 수만 명이 다니더라 — 또 허풍을 때리지요. 바깥 얘기를 안으로 전해주고, 안의 얘기를 바깥으로 전하는, 두 종류의 얘기꾼이 있는 거예요.

그런데 한국 같은 변방 — 그땐 변방이었지요, 중앙을 중심으로 두고 보면 — 그 변방을 놓고 얘기하자면. 세계 문학이라는 개념을 가장 먼저 말한 게 괴테라고 알려져 있는데, 괴테 당대가 18세기 아닙니까. 괴테가 세계 문학을 말했을 때 그의 뇌리에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가 들어 있었겠는가. 없죠. 그가 말한 세계 문학이라는 건 유럽 문학입니다. 그 위에 형성된 세계 문학의 보편성이라는 게 결국 유럽적 보편주의예요. 내가 노벨상을 비판하는 것도 그런 이유거든. 그 뒤로 어떻게 됐느냐. 제국주의가 발화하면서, 말하자면 그 유럽적 보편주의 안에 들어가야 하는 거예요. 그래야 보편성에 진입하는 거지. 그 안에 들어가면 세계 속에 존재하는 거고, 들어가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거예요. 그것을 권력의 레토릭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 보편주의를 대개 좌파들이 그렇게 비판해 왔지요.

유럽 좌파들도 마찬가지고, 우리는 더 그랬어요. 그들의 목적은 토박이성을 억제하거나 말살하는 데 있었어요. 그런 보편주의를 내세워야 하니까 토박이 얘기꾼보다 외방 얘기꾼이 훨씬 유리한 세상이 된 거지요. 황석영이를 봐라, 그 자신이 보더라도 — 나는 어차피 외방에 속해 있거든. 스스로 생각해보면 그래요. 그럼 「장사의 꿈」 같은 건 어떻게 썼느냐. 그건 공부해서 쓴 거예요. 노력해서. 그걸 깨닫고.

내가 후반기에 문학을 하면서 한 30여 개국에 번역이 나가 있으니까 행사를 많이 다녔을 거 아니에요. 어느 날 프랑스에서 행사를 하는데 한 기자가 물어요. — 너는 동시대에 라이벌이 없냐, 라이벌이 있을 거 아니냐. — 잠깐 생각하니까 팍 떠올라요. 아, 나한테도 라이벌이 있네. 이문구라는 작가가 떠올랐어요. 이문구라고 있다고 얘기해줬지. 그랬더니 — 왜 너희가 라이벌이냐. — 그래서 대답했어요. 나는 그 사람 같은 작품을 쓸 수 없고, 그 사람은 나 같은 작품을 쓸 수가 없다. 가장 큰 차이는, 내 작품은 번역하기가 굉장히 쉽고 그의 작품은 번역하기가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어렵다. 그만큼 토속적인 문장을 쓰는 사람이다. 그런데 황석영의 작품도 지금 그쪽으로 가고 있다. 자꾸 번역하기가 힘들어져서 손해를 보고 있지만 그쪽으로 가고 있다고. 내가 그렇게 대답했어요.

그런데 이게 무슨 얘기냐 하면. 요즘 현실에서는 노마드라는 게 하나의 문화적 전략, 심지어 칭찬할 만한 미덕처럼 떠받들어졌잖아요. 그러는 동안 토박이성은 거의 멸살되고, 정체성 얘기를 꺼내면 촌놈, 웃기는 놈이 돼버리는 식이었어요. 그런데 이게 대단히 중요한 거예요. 정말 외방 얘기꾼이 훌륭한 얘기꾼이 되려면, 토박이의 깊이에 대한 경외감을 가져야 한다는 거지. 사랑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바닥에 깔고 있어야 해요. 그래야 자기의 부족한 점을 메우면서 완성에 가까워지는 작가가 됩니다.


여기까지가 벤야민이 한 얘기예요. 그 뒤에 내가 다른 자리에서 덧붙인 거지. 20세기 문학을 보자고. 2차 대전을 거치고 온갖 고통을 겪고 정신을 차려 보니, 그때 깨닫게 된 또 다른 휴머니티가 있어요. 거기에 감동이 실려 있죠. 그 고통이 바닥에 깔려 있었으니까. 그러다 20세기 중반으로 오면서 그게 다 흐트러지고 굉장히 양식화됩니다. 양식주의로 가고, 벽에 부딪히고. 재미가 없어져요. 서사가 점점 맥이 빠지고 사라져 갈 무렵, 라틴아메리카 문학이 확 들어옵니다.


일산에서 시내로 나가려면 자유로를 타고 가는데, 옛날에 택시를 타고 가던 길이지. 거기가 강가니까 바다 쪽에서 해무(海霧)가 올라와요. 안개가 굉장히 짙게 꼈는데, 차가 가다 서다 한 시간 넘게 밀려서 앞이 완전히 하얘. 그런데 그 안개 속으로 오리떼가 낮게 지나가더라고. 강변 쪽으로 옆으로 흘러가요. 뭐가 움직이나 했더니 — 아, 오리 떼구나. 혼자 앉아서 생각을 한 거지요.


사실 이쪽하고 거의 싸워오면서 지나온 세월이에요. 그러면서 조금씩 변하기는 했지만 크게 변한 건 아닙니다. 천천히 변했지요. 처음에 — 번역원이 생기기 전에는 문예진흥원이라는 게 있었어요. 군사정권 때 만들어진 기관이지요. 문화부에서 퇴직하는 관료들이 마지막을 정리하는 자리로 문예진흥원에 가서 한 자리씩 차지하곤 했어요. 그 기금이 어디서 났느냐 하면, 극장 티켓 값에서 몇 퍼센트를 문예진흥 기금으로 떼어내게 만들어놨어요. 그래서 돈이 많았습니다. 눈먼 돈이지. 김대중 정부 때 감사를 해보니, 돈을 마음대로 쓴 거지. 극장 수입 대부분을 공무원을 유지하는 데 썼고, 지원은 자기네 말 잘 듣는 사람들 중심으로 했어요.


내가 옛날부터 47그룹처럼 가야 한다고 봤어요. 독일에 47그룹이 있었지요, 2차 대전 끝나고. 그 작가들이 무슨 조직을 갖춘 게 아니라, 문화 정책이나 사회 현상에 대해 발언할 때 모여서 — 이 발언을 함께하자 — 할 때 참가할 사람은 참가하고 빠질 사람은 빠지고, 마음대로 하는 거지요. 그런 식으로 가야 한다. 그러니까 옛날 저항 단체들 — 작가회의니 뭐니 하는 것들 — 이걸 해소하고 그쪽으로 가야 한다. 그리고 장르를 다 합쳐서, 음악과 미술과 영화와 문학을 묶는 그룹을 만들자. 그런데 문단에서는 안 먹혔어요. 영화계가 그걸 받아들여서 영화인과 문학인 모임을 자주 가졌지요. 차승재가 그걸 받아서 했어요. 그래서 영화 쪽하고 친해진 거지. 지금 장르 문제도 그렇고, 레지던시도 그렇게 종합적으로 가야 합니다.


옛날에 한 번 잘못 얘기했다가 곤혹스러운 적이 있어요. 어느 청중이 — ‘왜 문창과 안 나오고 철학과를 다녔냐’ — 묻길래 이렇게 답했어요. 사실은 고등학교 때 공부도 안 하고 가출해서 떠돌고 그러는 바람에 성적이 좋지 않았어요. 대학을 갈까 말까 하다가, 우연히 어떻게 들어가게 된 게 그 학교예요.


별로 없어요. 서로 너무 달라서. 작가한테 물어보면 작가가 답하기가 굉장히 곤란합니다. 게다가 동료 작가들은 거의 다 죽었어요. 나하고 친하던 사람들은 다 갔지요. 이문구, 조세희 — 조세희도 참 좋은 작가인데 많이 쓰지는 않았어요. 김지하도 좋은 작가고 좋은 시인이고.

김재준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