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중 | 디자인학 박사, 웹진문강 편집위원 경계를 넘는 사람들 1950년 무렵의 도쿄. 예술대학에서 성악을 공부하던 학생 하나가 신생 전자회사를 찾아가 테이프리코더의 음질을 조목조목 따졌다. 발레리나가 거울 앞에서 몸을 다듬듯 음악가는 녹음기로 제 소리를 되돌려 들으며 연습해야 하는데 이 기계의 소리는 그 기준에 한참 못 미친다는 것이었다. 회사는 건방진 학생을 내쫓는 대신 자문역으로 앉혔다. 학생의 이름은…
2026 코카카아트페스티벌, 만남의 축제를 넘어 공연예술 생태계 플랫폼으로 소홍삼 | 한국문화예술회관연합회 회장(관악문화재단 대표) 부산 영화의전당에서 개최된 2026 ‘코카카아트페스티벌’이 역대 최대 규모의 공연예술 관계자들이 참가한 가운데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코카카아트페스티벌은 그동안 전국 문화예술회관과 예술단체를 연결하며 대한민국 공연예술 유통의 핵심 플랫폼으로 성장해 왔다. 몇 년간 부침이 있었지만, 국내 최대 규모의 공연예술 아트마켓이라 할 만큼 양적 성장을 축적해…
서(書)의 뿌리에서 동서양 미학, 작품 해석과 공공성까지 따라가는 예술의 여정 김재준 | 웹진문강 편집장, 국민대 명예교수박대성 | 화백 목차 1장. 작가의 자리 — 평론은 무엇을 발견하는가 평론은 작가를 비판하는 일이 아니라 미술사 안에서 그의 자리를 찾아 주는 일이며, 새로운 것은 오히려 노대가에게 있다는 깨달음이 대담 전체의 바닥에 깔린다. 김재준 제 소개를 드리자면, 제 인생은 거의…
오는 7일 ‘제2회 문화강국 국회토론회’가 문화강국네트워크 주관으로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다. 문화예술계·정책현장 전문가들 참여 창작자 권익과 문화분권 해법 모색 우리나라 문화 정책의 철학과 지속가능성을 주제로 토론회가 열린다. 사단법인 문화강국네트워크는 오는 7일 국회의원회관 제2세미나실에서 ‘제2회 문화강국 국회토론회’가 열린다고 3일 밝혔다. 이번 토론회는 민주당 문화예술특별위원회와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 강유정, 김윤덕, 민형배, 박수현, 양문석, 이기헌, 임오경, 전재수, 조계원 의원이 이…
[사진=(사)문화강국네트워크] ‘문화산업과 문화의 가치, 그리고 K-다움’을 주제로 한 제3회 (사)문화강국네트워크 국회 토론회가 오는 7일 오후 2시, 국회의원회관 제2간담회실에서 열린다. 이번 행사는 더불어민주당 문화예술특별위원회와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 조계원 의원실을 비롯해 전재수·임오경·김윤덕·민형배·박수현·강유정·양문석·이기헌 의원실이 공동 주최하며, (사)문화강국네트워크(이사장 이우종)가 주관한다. 특히 이날 토론회는 최근 ‘K문화강국위원장’으로 위촉된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명지대 석좌교수)이 좌장과 기조발제를 맡은 첫 공식 일정이다. 유 위원장은 발제를…
평론은 작가를 비판하는 일이 아니라 미술사 안에서 그의 자리를 찾아 주는 일이며, 새로운 것은 오히려 노대가에게 있다는 깨달음이 대담 전체의 바닥에 깔린다.
김재준
제 소개를 드리자면, 제 인생은 거의 반반입니다. 절반은 경제학자로 살았고, 나머지 절반은 미술과 예술이었지요. 그림도 그려 보고, 평론도 썼습니다 — 서양화의 이강소, 설악산의 김종학 선생님. 그런데 저는 미술 평론과 문학 평론이 따로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그냥 예술 평론이지요. 선생님 작업을 봐도 문학적인 데가 많고요.
박대성
그렇게 보아주시니 감사합니다. 허허.
김재준
저는 평론은 작품에 비하면 부차적인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평론이 작가를 비판하는 일이라고 보지 않아요. 이 작가가 세계 미술사에서 어디쯤 서 있는가, 그 자리를 찾아 주는 일이라고 봅니다.
박대성
요새는 그게 세계적으로 다 드러나 있으니까, 그래서 지금이 중요한 시기지요.
김재준
예술은 국력과 함께 가는 데가 있는 것 같아요. 한국이 선진국이 되니 한국 예술에 세계의 눈이 오는 거고요.
박대성
그게 비례하거든요. 맞아요. 나는 거기 동의합니다.
김재준
좋은 작가들이 한국에도 여기저기 숨어 있는데 평론이 그걸 못 알아 주는 것은 아닐까요? 꼭 젊어야 새로운 것도 아니고요 — 오히려 노대가에게서 더 새로운 게 나올 때가 많습니다. 선생님의 2017년 작업, 창밖으로 석탑과 소나무가 보이고 노란 달이 뜬 그림을 처음 봤을 때 저는 엄청나게 충격을 받았어요.
박대성
그건 이 뒷마당을 소재로 삼은 겁니다.
김재준
평론이라는 게 결국 한두 문장으로 작가를 짚어 내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예전에 김종학 선생님께 드린 글의 핵심 문장이 이거였습니다.
— "화가 김종학 안에는 한 사람의 무당과 한 사람의 선비가 동시에 살고 있다."
그랬더니 박수를 치시며 "바로 그거다" 하시더군요. 박대성 선생님의 예술도 이렇게 한 문장으로 표현해 보고 싶습니다. 시간이 걸리겠지만요.
박대성
기대해 보겠습니다.
2장. 서(書)에서 화(畵)로 — 글씨라는 뿌리
박대성 예술의 척추는 글씨다. 문자가 곧 상형이며, “서에는 법이 있고 화에는 법이 없다”는 한마디가 그의 작업 원리를 압축한다. 칼로 새기는 전각까지, 글씨의 뿌리가 화면 위로 뻗어 나간다
박대성
한국화에는 기본기가 있습니다. 바로 서도(書道)예요. 그게 먼저 풀려야 합니다. 정신성이면서, 탄탄한 터를 닦는 일이지요. 그 터를 닦은 뒤라야 붓이 자유로워져요. 붓이 노니는 자리엔 걸릴 게 없잖아요. 내가 평생 매달린 건 글씨예요. 거기서 다 얻었습니다. 문자가 곧 상형(象形)이거든요. 형태만 가져온 게 아니라, 그 의미와 자연의 모습을 글씨가 붙잡아 낸 겁니다. 그게 굉장한 거예요.
김재준
한자 안에는 이미지가 이미 들어 있는 셈이군요.
박대성
그렇죠. 그래서 학생이 오면 그림부터 그리라 하지 않고 서도부터 가르칩니다. 붓을 섬세하게 다루다 보면, 그 섬세함이 마음에서 길러져 나오거든요.
김재준
조선이나 중국도 그림 이전에 글자부터 가르쳤다고 보아야겠지요?
박대성
그렇습니다. 추사도 글씨를 다 이룬 뒤에 그림으로 갔어요. 세한도가 그렇잖아요.
김재준
서도의 붓과 그림의 붓이 같으니, 결국 한 원리네요.
박대성
서법으로 화를 토해내는 겁니다. 서(書)에는 법이 있고, 화(畵)에는 법이 없습니다.
김재준
그 말씀이 참 좋습니다.
박대성
서라는 철저한 법을 깨친 다음, 사물을 보는 화를 끌어들여 그 정신을 풀어내는 거예요.
김재준
'화에는 법이 없다' — 처음 듣는데, 그게 핵심이군요.
박대성
핵심이지요. 나는 그 이치를 아프리카 조각에서 느낍니다. 기상천외해요. 어떻게 저런 조형을 빚었나 싶고. 사람 형상 위에 온갖 걸 얹어도, 어디에 둬도 그게 작품이 된단 말이에요.
직접 새긴 전각(篆刻)을 보며
박대성
이건 칼로 도장 돌에 새긴 거예요. 전각의 맛이지요. 칼 맛이라는 게 따로 있거든요
3장. 동양과 서양 사이 — 수용의 통로, 여백, 그리고 아프리카의 원초성
진경산수이면서 동시대적인 양면성에서 출발해, 서양이 동양을 받아들이는 세 통로와 박대성의 제4의 길을 짚는다. 여백이 곧 추상이라는 관점, 출발이 다르다는 비교, 아프리카 미술의 원초성을 통한 서양 비판으로 흐른다. 화실의 폭포 그림(금강산을 그린 대작)을 앞에 두고.
김재준
선생님 그림엔 양면성이 있는 것 같아요. 한편으로는 진경산수의 완성자인데, 동시에 굉장히 동시대적이지요. 수묵을 지킨 채로 근대성마저 넘어선 자리랄까요. 그 둘이 동시에 마음에 계신 겁니까?
박대성
그쪽으로 애쓰고 있습니다. 그렇게 정리해서 말해 주는 건 처음 듣네요
김재준
동양의 미학을 서양이 많이 가져다 썼는데, 받아들이는 통로가 정해져 있더군요. 추상으로 바꾸거나, 개념으로 비틀거나, 역사의 일부로 다루거나 — 그 세 통로를 거쳐야 서양 주류가 동양 작가를 받아들였어요. 그런데 선생님은 그 셋 중 어디도 아닌, 구상을 지키면서 동시대를 건드리는 새 길이라 흥미로웠습니다.
박대성
동의합니다. 나도 그걸 바라고 있어요.
김재준
선생님 작품 안엔 추상성도 있고요.
박대성
이 여백 자체가 추상입니다. 그게 바탕이 되어 있어요.
김재준
서양이 근대에 와서 도달한 추상이, 고대 동양화엔 이미 있었던 셈이네요.
박대성
요새 서양화 책을 보면 사진도 아니고… 사진이 이미 다 해 버렸잖아요. 구상을 정교하게 좇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요.
김재준
서양식으로 진경산수를 구상화하는 건 싫으시겠어요.
박대성
그건 옛날 지체 높은 분들 주문으로 그리던 거고요. 요새는 사진이 워낙 발달했으니까.
김재준
사진으로 작업을 해 보신 적은요?
박대성
나는 손이 하나뿐이라, 한 길만 갑니다. 내 것 외엔 남의 걸 안 건드려요. 내가 가는 길이 따로 있는 거지요.
김재준
동양화 전공이라도 여러가지로 시도해 보는 분들이 있잖아요
박대성
하나만 제대로 해도 충분합니다. 한국 동양화엔 21세기에도 따라올 수 없는 게 있어요. 여백의 미지요. 서양 회화는 벽에 페인트 칠하다가 그림으로 간 거예요. 우리는 선비가 글씨를 쓰다가 난초 치고 사군자 치다가 동양화가 됐고요. 출발이 다릅니다. 우열이 아니라, 뿌리가 다른 거예요.
김재준
수묵은 한·중·일에 다 있는데, 한국 수묵은 뭐가 다른지 서양 사람이 물으면요?
박대성
한국은 좀 더 직관적이지요. 추사의 세한도를 보세요. 추상과 구상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한꺼번에 말합니다. 서양 미술은, 아프리카에 견주면 아직 그 발끝에도 못 미쳐요. 나는 아프리카 미술을 좋아해서 소장도 했습니다. 서양은 거기서 진수만 빼먹었어요. 심한 말인지 몰라도, 그 현대미술이라는 게 겉돌며 헤매는 수준에 지나지 않아요. 억지로 추상 하나 만들어내는데, 나는 동의 못 합니다. 지금도 아프리카 조형을 보면 — 어떻게 이런 구상을, 이런 형상을 빚었나 싶어요.
김재준
저도 서양 미술이 너무 머리만 쓰는 것 같아 아쉬웠어요. 미술엔 원초적인 힘이 있어야 하는데, 한국 젊은 작가들까지 거기 빠져 힘을 잃는 게 아닌가 싶고요.
박대성
나야 우연히 이 길로 든 거예요. 알고 한 게 아니라, 어릴 때부터 들어선 길이 신체의 운명처럼 여기까지 끌고 온 거지요. 돌아보면 다른 데로는 갈 수 없게 내몰린 거고.
4장. 고난의 승화 — 정신성은 어디서 오는가
정신성은 재주가 아니라 고난에서 온다. “추사가 마지막이었다”는 단언, 현대 한국미술의 정신성 부재 비판, 그리고 고난의 시간을 건너온 작가 자신의 운명이 한 줄기로 모인다.
김재준
근현대 한국 화가 중에 전통과 새로움을 함께 빚었다 싶은 분이 계세요?
박대성
좋은 화가들은 많지만 내가 보기엔 추사가 마지막이었어요. 앞으로 더 없어질 거예요.
김재준
추사가 마지막이라고요.
박대성
지금은 그 수준에서 뚝 떨어졌어요. 추사가 재주만으로 된 게 아니거든요. 그 출중함은 엄청난 고난에서 나온 겁니다. 사람이 견디기 힘든 시련과 고뇌를 다 겪었으니, 그게 승화한 거예요.
김재준
예술은 참으로 어려운 세계인 것 같습니다.
박대성
나와 친했던 화가들이지만 어찌 보면 내 생각엔 말장난으로 보일 때도 있었어요. 그림은 숙연하게 와야 하고, 폐부를 찔러야 하는데 그게 없잖아요. 어떤 화랑들은 장사를 하고 있어요. 그건 지양돼야 합니다. 조형은 끝없이 투쟁해서 얻는 건데, 쉽게 찍어내면 개성이 그렇게 설 리가 없지요. 좋은 작가는 투쟁한 흔적이 있어요. 가벼운 데가 없잖아요.
나는 좋은 집안과는 거리가 멀어요. 진작 죽었어야 할 몸이 살아남은 거예요.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지요. 너무 가난했고, 이 몸이라도 악착같이 굴리지 않으면 안 되는 운명이었어요. 모진 곳에서 목숨을 여러 번 걸었습니다. 태어난 데가 청도예요. 지금도 거기 내 집이 있어요. 거기서 자라 올라와 오늘 이 자리에 앉은 거고요.
김재준
예술가는 편안하면 안 되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그 모진 시간이 다 그림에 들어가 있잖아요.
박대성
하여튼 우리는 너무 모질게 살았어요.
5장. 작품 앞에서 — 노란 달·천지·구도를 읽다
앞선 장의 개념들이 실제 화폭 위에서 입증되는, 박대성론의 절정. 금강산과 천지의 구도를 읽고, 노란 달 그림을 불교적 정신성으로 해석하며,
“경주에 앉아서도 동시대 거장이 될 수 있다”는 자리에 이른다.
김재준
이건 금강산이네요. 머릿속 이미지를 스케치로 옮기십니까, 마음에서 바로 나옵니까?
박대성
스케치가 많아요. 그걸 바탕으로 그립니다
김재준
그림 그리실 때 시간이 얼마나 걸리세요?
박대성
이것만 붙들고 있는 게 아니거든요. 이거 그리다 저것도 오가고. 소재가 워낙 많아서 집중을 해 줘야 합니다. 나는 다변(多變)해야 해요. 표현의 폭을 자꾸 넓혀야 하고.
김재준
보통 사람이 이 그림 앞에서 어떻게 봐야 하느냐 물으면요?
박대성
그냥 보면 됩니다. 사실을 그대로 옮긴 거나 다름없어요.
김재준
아래쪽 구도가 특이해요. 흐르다가 묘해지고, 집 두 채는 일부러 비스듬히…
박대성
약간 삐딱하게 시작합니다. 그래야 동적인 맛이 나거든요. 그 구도는 내가 차용한 거고.
김재준
이 미니멀한 면 분할은 정신성이 있으면서 현실성도 있고요. 이 천지(天池)도 구도가 아주 새롭습니다
박대성
새롭지요. 관습적인 동양화만 그려서는 이런 구도가 안 나와요. 나는 그런 구도를 많이 생각합니다.
김재준
부끄럽지만 제 작년 작업도 한번 봐 주세요. 동양화의 재해석인데, 이 굵은 선들이 풍경이면서 글자로도 볼 수 있게 만들었어요. 작은 사람을 넣으면 느낌이 확 달라지더군요.
박대성
좋습니다. 3개의 다른 그림이 한 사람이 그렸다는 느낌이 나네요
김재준
원래 미술을 이해해 보려 그리기 시작한 게 25년 됐어요. 재능은 없는데, 그래도 자꾸 하니 조금씩 늘더군요.
박대성
나는 칼라보다 이런 흑백, 미니멀한 게 좋네요. 꾸준히 해 보세요.
김재준
먹이 참 어렵습니다. 선생님에 대해 평론을 한 편 써 봤어요. 서양 미술사 안에 놓고 본 거지요 —케네스 놀란드, 엘스워스 켈리, 그런 작가들과 선생님이 무엇이 다른가. 제가 느낀 건, 선생님 작품엔 아직도 새것이 숨어 있다는 거예요. 그 노란 달 그림을 저는 불교적인 그림으로 읽었습니다. 경주 남산의 분위기와도 맞고요. 현대미술을 하려면 파리로, 뉴욕으로 간다지만 — 경주에 앉아서도 동시대의 거장이 될 수 있다고 봤어요. 원효도 중국 안 가고 여기서 깨쳤잖아요. 서양은 정신성을 위해 추상으로 갔는데, 선생님은 추상에 기대지 않고 구상의 세계로 그 정신에 이르더군요. 다만 쉬운 주제가 아니라, 지금 건 초고예요. 몇 달 더 묵히면 더 나은 글이 될 것 같습니다.
6장. 다음 세대에게 — 실험정신과 서도의 기초
젊은 작가들에게 주는 말. 실험정신의 부재와 학교·스승으로부터의 독립을 말하고, 기초 훈련의 자리를 되묻는다.
2장의 글씨가 여기서 “기교 전에 서도부터”라는 교육 처방으로 다시 호흡한다
김재준
2~30대 젊은 작가들에게 한 말씀 해 주신다면요?
박대성
실험정신이 너무 없어요. 학교에, 스승에 너무 매여 있고. 어느 만큼 크면 스스로 독립을 해야지요. 미술도 그래야 하는데, 나이 들도록 그 스승의 조형 언어에서 못 벗어나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김재준
미술대학 교육에도 문제가 많다고 보시나요?
박대성
차라리 그걸 벗어 던져야 해요. 가르치는 교수마저 틀을 못 벗는데, 좁은 틀 속에서 긴 세월을 보내며 정작 중요한 걸 놓치고 있어요. 무엇이든 부정하는 데서 새것이 나오고, 부정한다고 다 부정되는 것도 아니거든요. 하다 보면 긍정과 어우러져 새로운 조형 언어가 됩니다. 요새는 가르치는 사람부터 일가를 못 이뤘는데 뭘 가르치겠어요. 우리 시대 원로들은 고뇌가 있었고 테크닉도 제 방식도 다 수련했는데, 요샌 안 보여요. '추상이다' 하는 걸로 눈가림이나 하고, 진짜 경험에서 우러난 추상성이 없어요.
김재준
몇 해 전 홍익대가 실기 시험을 없앴잖아요. 아이디어가 중요하다지만, 기초 훈련을 너무 일찍 버린 건 아닌가 싶고요.
박대성
처음엔 좀 끌어줄 필요가 있지요. '이건 빨강, 이건 노랑' 삼원색 정도는 일러 주되, 너무 깊이 들어가 틀을 씌울 건 없어요.
김재준
동양 붓은 서양 붓보다 다루기가 훨씬 어렵던데, 그래서 오히려 훈련엔 더 좋겠더라고요.
박대성
동양 붓을 다룰 줄 알면 그만큼 섬세함을 갖춘 거예요. 옛 중국에선 풀죽을 먹어도 글씨 수련만은 거르지 않았어요. 그만큼 정신을 차려야 하는 거지요. 뇌의 훈련 과정이 길어요. 길수록 깊어지고.
김재준
그럼 재주 있는 아이라도, 기교보다 서예부터 시키는 게 낫겠네요.
박대성
그림부터 시키지 말고, 서예를 제대로 배우게 하세요. 어느 정도 되거든 그때 그림을 가르치고. 글씨를 못 쓰면 기초가 안 서요. 그게 상형 문자라, 거기에 다 들어 있거든요.
김재준
동양화든 서양화든, 처음엔 서예부터 — 그게 답이군요.
7장. 미술 바깥의 조건 — 시장·국가·공공성
예술을 둘러싼 세속의 조건들. 중국 미술관 초대와 국가 차원의 홍보, 미국 체류와 기업의 후원, 슈뢰더의 안목, 기증과 공공성에 이르기까지 — 작품 바깥에서 작품의 운명을 결정하는 힘들을 짚는다.
박대성
한 12, 13년 전에 중국에서 연락이 왔어요. '선생님 재료를 가져가 연구하겠다'며 달라기에 줬지요. 세 번을 가져가더니, 얼마 뒤 중국 현대미술관에서 초대를 한다는 거예요. 내가 그랬어요. '우리나라 현대미술관에도 못 들어가 봤는데 어떻게 중국이 부르느냐.
가 보니 베이징 좋은 자리에, 굉장히 큽디다. 3층 대전시실이 수백 평이에요. 나는 대작을 많이 하니까, 북경 전람회 날짜 받아 그림을 왕창 실어 보냈지요. 그랬더니 사람들이 '이 3층에 초대받아 온 사람이 없다, 옛날 돌아간 분들 몇뿐이었다' 그래요. 아무나 서는 데가 아니라는 거지요. 중국이 그런 면은 솔직해요. 실력을 인정한 겁니다.
전시를 마친 밤 10시쯤, 중국 사람이 통역을 데리고 찾아왔어요. '중국 미술이 제 것을 현대화하지 못하는데, 박 선생을 보니 현대화된 수묵이 보였다. 이걸 좀 견인해 달라. 백지수표를 줄 테니 액수를 써 달라'는 거예요. 옆에서 집사람이 그래요. '우리 역사를 보면 이놈들이 얼마나 못된 놈들인데, 그걸 왜 해 주려 하느냐. 하지 마라.' 그래서 참고 왔지요. 지금 생각하면 안 하길 잘했어요.
김재준
미술사가 바뀔 뻔했네요.
박대성
그때 중국 신문이 제목을 '이가염(李可染)을 넘는 작가가 왔다'고 뽑았어요
김재준
이가염, 대단한 분이지요. 얼마 전엔 뉴욕타임스에도 선생님 기사가 나갔어요.
박대성
그래요. 그리고 이런 일도 있었어요. 촬영팀 100명쯤이 와서 사흘을 대대적으로 찍었어요. 왜 그러느냐 물으니, 이강소와 또 한 사람 그리고 나, 셋을 찍는다더군요. 문체부에서 '음악은 세계적으로 성공했으니 이제 미술을 집중해 홍보하자' 해서 잡은 기획이랍니다. 우리나라 제일 큰 촬영팀이라는데, 새벽 6시부터 저녁 7시 반까지 어찌나 치밀하게 찍던지. 이 화실만이 아니라 바깥에서 라이트를 비추고 밤낮으로 세트를 만들어요. 일사불란하더군요. 그게 결국 몇 분짜리인데, 23개도시에 튼답니다.
김재준
한국 홍보네요..
박대성
홍보지요. 비싼 광고를 사서, 광화문 큰 화면에 트는 것처럼 한답니다. 살다가 별일이라 했어요. 내가 미국서 1년 살았어요. 영어를 못해도 서양을 알아야겠다 싶어서. 그때 가나아트 전속이었는데, 이건희 회장께 '서양에 나가 봐야겠으니 환경을 마련해 달라' 했더니 해 주셨지요. 기자들이 '영어도 모르면서 어떻게 가느냐' 했지만, 가 보니 벙어리도 다 살더군요. 하고 싶은 말 다 하게 돼요. 딴 도시는 안 가고 제일 번화한 데가 어디냐 하니 뉴욕이라기에, 미술 거리가 어디냐 하니 소호라기에 — 소호 옆에 자리 잡고 슬리퍼 끌고 나가면 바로 거기였어요. 미술은 말 없이도 합니다. 눈으로 보고 하는 거예요.
김재준
독일 슈뢰더 총리가 미술을 좋아하고 눈이 높지요. 선생님 그림을 보고 '좋다' 했다는 건, 거기 뭔가 있다는 걸 알아본 겁니다
평창 동계올림픽 무렵 인사동 전시에서 만났고, 슈뢰더 부부가 신혼여행을 미루고 경주 화실로 찾아온 일화가 오갔다. 박대성은 6·25 때, 슈뢰더는 전쟁 때 아버지를 여읜 닮은 운명을 이야기했다
박대성
미국 좋은 미술관에 가니 작품마다 기증자 이름표가 붙어 있어요. '선진국은 그냥 되는 게 아니구나' 싶었지요. 우리도 그런 문화가 돼야 합니다. 귀한 작품은 많은 사람이 봐야지, 개인이 쥐고 있으면 몇이나 보고 끝나겠어요. 미술은 공공의 것이어야 해요. 삼성도 훌륭합니다. 그 수집의 전통은 높이 삽니다. 수집이 곧 문화고, 업그레이드예요.
8장. 백두산의 토양 — 영산·계절풍·씨앗
대담을 닫는, 가장 멀리까지 번지는 장. 백두산의 계절풍이 꽃씨를 온 세계로 들어 올리듯, 한국이라는 토양에서 예술이 싹터 세계로 뿌려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끝난다.
박대성
설악산은 30년 가까이 드나들었어요. 히말라야도 10년쯤 오갔고, 백두산엔 여러 번 갔지요. 백두산은 보통 산이 아닙니다. 세계에서 가장 영(靈)한 산이에요. 유일하게 사계절이 또렷하고요. 20년도 더 됐네요. 동아일보에서 '백두산의 봄' 답사단을 모집하기에, 내가 전화를 걸어 '나도 가고 싶다' 했어요. '뭐 하는 분이냐' 묻기에 '그림 한다' 하니 오라더군요. 그림 그리는 사람은 나 혼자였어요. 회비 내고, 북경을 거쳐 백두산에 갔지요. 저녁 6시쯤 천지에 닿았어요.
버스에 한 3, 40명이 탔는데 '다 왔으니 내리자' 해요. 바깥을 보니 해가 뉘엿한데, 꽃이 만발해 잔디를 온통 덮고 있어요. 나는 차마 그걸 못 밟겠더군요. 그런데 꽃 찍는 작가들은 장비를 밀며 '왜 빨리 안 내리느냐' 재촉을 해요. 한 번 답사하고, 다시 가서 일주일을 머물렀지요. 들은 얘기로는, 사계절이 또렷한 건 우리나라뿐이랍니다. 백두산 봄은 딱 일주일인데, 하루가 모자랄 만큼 짧아요. 그 사이 엄청난 종류의 꽃이 피었다가, 너덧새 만에 다 져요.
박대성
오묘한 게, 11월 중순 넘으면 백두산 계절풍이 불어요. 2,700미터 정상에서 보면 회오리바람 —우리는 '호드락 바람'이라 합니다 — 이 돌돌 말려 올라가요. 그게 꽃씨를 수천 미터 하늘로 들어 올리는 겁니다. 그렇게 씨앗이 온 세계로 퍼진다고 해요. 2,700미터에서 불길처럼 솟구치니, 만방으로 꽃씨가 날아가는 거지요.
그런데 6·25 때 '씨앗 전쟁'이 있었어요. 선진국들이 우리 씨앗이 좋다는 걸 알고, 그때 다 빼 갔답니다. 두만강 일대가 콩의 원산지인데, 거기 종자가 다 퍼져 나갔다는 거예요. 한국은 씨앗을 길러내는 땅이에요. 화강암이라 흙이 제일 좋다고들 하지요
김재준
그러면 예술도 한국에서 싹터 온 세계로 퍼지면 좋겠네요.
박대성
화강암이라는 땅이 가장 맑은 물을 길러 정화시켜요. 한반도가 지구 융기 때 가장 높은 열에서 빚어졌기에 화강암이 된 거지요. 거기서 벗어나면 일본은 현무암 — 검은 돌이라 물이 시커멓고, 중국이나 유럽은 석회암이라 물을 끓여 먹어야 하잖아요. 우리는 천혜의 요지예요. 한국 사람이 영민한 건 그냥 그런 게 아니라, 사계절을 다 겪는 변화무쌍한 자연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아서지요. 중동 같은 데는 채소가 없어 양고기나 굽지만, 우리는 천국에 살면서 그걸 모르는 거예요.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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